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인조반정 1623(광해군 15)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인조)을 왕으로 세운 정변. 광해군은 임진왜란 후 대북파를 기용하여 개혁적인 정책을 펴 나갔다. 그러나, 적자가 아니었던 광해군은 형제들을 죽이고, 대비를 유폐하였고, 오랑캐라고 할 수 있는 후금과 명에 균형외교를 유지하여 중화사상에 물든 서인들의 불만이 컸다.

 

서인세력은 사림을 규합해 선조의 손자 능양군을 왕위에 올리기로 하고 반정을 일으켰다. 당시 훈련대장 이흥립이 성문을 열어 반군을 맞아들여 반정은 쉽게 성공했다. 반정세력은 인목대비를 복권하고, 광해군을 폐위하고 능양군을 왕위에 올렸다. 또한 집권했던 대북파들을 처형하고, 자신들은 정사공신이 되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내정과 외교에서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다. 내정 면에서 왜란으로 인해 파괴된 사고(史庫) 정비, 서적 간행, 대동법 시행, 군적(軍籍) 정비를 위한 호패법의 실시 등 많은 치적(治績)을 남겼으며, 외교 면에서도 만주에서 크게 성장한 후금(後金)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국제적인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했다. 그러나 왕위를 위협할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동복형(同腹兄)인 임해군(臨海君)과 유일한 적통(嫡統)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했으며,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호를 삭탈하고 경운궁(慶運宮:西宮)에 유폐(幽閉)했다.

 

이러한 행위는 성리학적 윤리관에 비추어 패륜으로 여겨졌고, 명을 배반하고 후금과 평화관계를 유지한 것도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던 당시의 사림들에게는 큰 불만이었다. 그리하여 광해군이 즉위할 당시부터 정치권력을 잃었던 서인세력들이 그러한 사류(士類)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정변을 계획했다.

 

1620년부터 이서·신경진(申景禛)이 먼저 반정의 계획을 수립한 후 구굉(具宏)·구인후(具仁垕) 등을 끌어들이고, 이어 김유·이귀·최명길(崔鳴吉) 등의 문신과 연계하여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면서 1623년 3월 1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진행시켰다. 이 계획은 거사 직전에 이이반(李而攽)의 고변(告變)에 의해 누설되었지만 광해군이 후궁과 연회를 즐기느라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예정대로 추진되었다. 능양군은 직접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이서가 장단으로부터 통솔해온 700여 명의 군사와 연서역(延曙驛)에서 합류한 후, 김유를 대장으로 삼아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했던 이귀·최명길·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 등의 600~700여 명의 군사, 그리고 이천으로부터 온 이중로(李重老)의 군사 등과 함께 창의문으로 진군하여 성문을 격파했다.

 

이어 창덕궁에 이르자 반정군에 포섭되었던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내응으로 훈련도감의 군사가 반정군을 체포하지 않고 오히려 성문을 열어줌으로써 대궐을 쉽게 점령했다. 반정세력은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호를 회복시켜준 후 그 권위를 빌려 광해군과 동궁을 폐출하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을 왕위에 추대했다. 한편 광해군은 반정군이 대궐에 침입한 뒤 비로소 대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으로 숨었으나 곧 체포되어 서인으로 강등된 후 강화로 귀양보내졌다.

 

또한 폐모정청(廢母庭請) 등에 앞장섰던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은 물론 북인으로서 광해군 말기까지 정치에 관여했던 수십 명이 처형을 당하고, 200여 명이 유배당했다. 반면 반정에 참여한 인물들은 1623년(인조 1) 윤 10월 53명이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책봉되었다.

 

인조반정 후 정권을 장악한 서인은, 광해조 대북정권 몰락의 원인을 정책의 패륜성에서도 찾았지만, 보다 주요한 원인은 당시 정치세력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던 서인·남인 등 다른 붕당의 존재와 반대의견을 무시함으로써 야기된 불만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서인정권은 북인을 도태시키면서도, 남인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임명하는 등 명분상 하자가 없는 남인을 크게 등용함으로써 반대당의 존재와 비판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괄의 난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한 뒤 서인들은 반정공신인 공서파와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로 갈라졌다. 공신들 간의 알력이 심해지면서 1624년 1월 문회·허통·이우 등이 이괄과 그의 아들 전·한명련·정충신·기자헌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했다.

 

이괄은 아들 전이 모반의 사실여부를 가린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붙잡혀 가게 되자, 전을 압송하러 온 이들을 죽인 후 1만 2,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역시 모반혐의로 압송되고 있던 한명련을 구출한 뒤 서울로 진격, 황주·마탄·임진 등에서 관군을 잇달아 격파하고 서울을 점령했으며, 선조의 아들 흥안군 제를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다음날 뒤쫓아온 관군에게 파주 길마재에서 크게 패하여 광주·이천으로 후퇴하던 중 죽음을 당함으로써 반란은 실패했다.

 

임진왜란 때 붕당간의 본격적인 쟁권(爭權)은 가장 주전론적 입장에 섰던 북인들의 승리로 귀결되었지만, 이들은 다시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대북(大北)·소북(小北)으로 나뉘었다.

 

이후 광해군대에 정인홍(鄭仁弘)·이이첨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북정권은 왕권의 확립을 위해 서인·남인 등 다른 붕당의 의견을 무시하고, 소북계의 지지를 받은 영창대군을 살해하며,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는 등 무리한 조치를 취했다. 이에 서인계열의 사림세력들은 패륜행위를 명분으로 대북정권을 타도하고 정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1623년(광해군 15) 서인계의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 등과 함경북도병마절도사 이괄 등은 반정을 위해 사모군(私募軍)을 이끌고 홍제원(弘濟院)에 모였다.

 

그런데 총지휘자로 추대되었던 김유(金瑬)가 사전 계획 누설을 이유로 소극적으로 행동하자, 이괄은 이를 비난했다. 따라서 반정에 성공한 후에도 김유와의 관계가 불편했다. 인조 즉위 후 서인들은 반정공신인 공서파(功西派)와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淸西派)로 갈려졌고, 공신들의 사적군사력이 그대로 유지되자 '훈신군관'에 대한 비난이 높아졌다.

 

공서파들은 정권 안정을 위해 대북·소북 인사의 처형과 반역음모 적발에 힘을 기울였고, 자기파 중심의 논공행상을 함에 따라 비서인이자 무관인 이괄은 한성부판윤에 머물게 되었다. 이어 후금(後金)의 성장으로 인해 북방문제가 심각해지자 이괄은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휘하의 평안북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에 임명되어 영변으로 출진했다.

 

그런데 1624년 1월에 문회(文晦)·허통(許通)·이우(李佑) 등이 이괄과 그의 아들 전(旃)·한명련(韓明璉)·정충신(鄭忠信)·기자헌(奇自獻)·현집(玄楫)·이시언(李時言)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했다. 이에 기자헌·현집 등을 문초했으나, 역모에 대한 단서는 잡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공서파들은 이괄이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두렵게 생각하고 일단 아들 전을 서울로 압송하여 문초하려 했다. 이에 이괄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전을 압송하러 온 이들을 죽이고 역시 서울로 잡혀가는 한명련을 구해내어 "군측(君側)의 악을 숙청한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1월 22일 항왜병(降倭兵) 100여 명을 선봉으로 하여 1만 2,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향했다. 이괄군은 도원수군과의 충돌을 피하여 영변-자산(慈山)-상원(祥原)-평산(平山)-개성의 진격로를 택했다. 이괄군은 황주신교(黃州薪橋)에서 정충신과 남이흥(南以興)의 군대와 싸워 크게 이긴 후, 평산(平山)이 경비가 엄함을 알고 봉산 고읍(古邑)에서 전탄(箭灘)을 건너 샛길로 진군하여 마탄(馬灘:예성강 상류)에서 또 관군을 대파했다. 이괄군이 개성으로 진격함에 따라 인조는 공주로 피난갔고, 2월 11일 반군은 서울에 입성하여 경복궁 옛터에 주둔하여 선조의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왕으로 추대하고, 관원을 배치하여 새로운 행정체제를 세웠다.

 

한편 각처에 방을 붙여 도민(都民)의 마음을 안심시키며 생업에 충실할 것을 당부했다. 이때 도원수 장만의 군사와 각지 관군의 연합군은 길마재[鞍峴]에서 진을 치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반란군의 공격에 응전했다. 2월 11일 이괄군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길마재를 포위·공격했으나, 대패하고 밤에 수구문(水口門:지금의 광희문)을 나와 광주(廣州)로 향하다가 관군의 추격으로 완전히 흩어졌다.

 

이후 이괄·한명련이 2월 15일 이천(利川)에서 부하장수 기익헌과 이수백에게 죽음을 당함으로써 난은 실패했다. 이괄의 난은 대내적으로 수도의 함락, 국왕의 몽진(蒙塵) 등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와 공신세력 내부의 갈등의 노골화, 어영청 등 군영재편을 초래했으며, 대외적으로는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이 후금으로 도망가 남침(南侵)의 야욕을 자극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의 명분을 제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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