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산군의 마음을 뒤흔든 장녹수

 

▶ 장녹수(? ~ 1506)

 

연산군하면 항상 같이 뜨오르는 인물이 장녹수다. 연산군 시대 신델렐라 이야기다. 제안대군(예종의 둘째 아들)의 종으로 가노와 혼인을 하고 자식까지 두었으나 연산군에 발탁돼 궁에 입궐하였다. 이후 연산군의 마음을 뒤흔들어 총애를 받았고 내명부 종3품 숙용에 이른 조선시대 신텔렐라 이야기가 이번 포스팅의 주제입니다.

 

▶ 장녹수의 출신성분 : 양반의 자제?

 

장녹수(張綠水)는 1502년(연산군 8년) 11월 25일의 실록에 처음 이름이 거론된다. 임금이 장녹수의 부친의 내력을 묻자 승지 이자건이 “장한필은 문과 출신으로 신이 무신년에 경차관으로 충청도에 갔을 때 문의 현령이었습니다.”라고 아뢰었다는 대목이다.

 

장한필은 1488년(성종 19년)에 종5품의 문의 현령으로 재임했다. 그러므로 장녹수는 어엿한 양반의 핏줄을 이어받았지만 천민의 신분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철저한 신분제도가 시행되었으므로 ‘일천즉천(一賤則賤)’의 법령에 따라 부모 중 한쪽이 천민이면 그 자식 역시 천민이 된다.

 

이런 정황을 종합해 보면 장녹수의 아버지 장한필이 문의 현령으로 재임할 때 관기와 관계하여 장녹수를 낳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장녹수처럼 양반과 천첩 사이에서 태어난 여식을 얼녀(孼女)라 한다. 유명한 기생 황진이가 얼녀였고, 월매의 딸 춘향이도 얼녀였다. 그러므로 장녹수는 어머니의 운명을 이어받아 어릴 적부터 기적에 들어 관기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 지방기와 경기

 

조선시대에 관기는 수령이나 벼슬아치들의 공식적인 성노리개였다. 관기는 서울 기생인 경기(京妓)와 지방 기생인 지방기(地方妓)로 구분된다. 지방기 중에서 미모와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경기로 뽑아 올렸는데, 성종 대에 완성된 《경국대전》에는 3년마다 지방기 150명을 뽑아 올리라는 조항이 명문화되어 있다.

 

연산군이 여악을 강화하면서 지방기를 대거 모집한 것은 불법이 아니라 통치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경기는 궁중의 여악을 관장하는 장악원에 들어가 무용이나 춤을 체계적으로 교육받은 뒤 진찬, 진연 같은 궁중잔치에 동원되었다. 그렇다면 장녹수 역시 지방기로 활동하다가 경기로 선발되어 서울에 올라왔을 것이다.

 

지방기가 경기로 뽑히게 되면 인생 역전의 기회가 만발했다. 작게는 고관대작들의 소실이 되어 영화를 누릴 수 있고 크게는 임금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고 면천까지 될 수 있었다. 특히 제안대군처럼 공인된 인물은 수많은 기생을 거느리고 풍류를 즐기며 세월을 흘려보냈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기였던 장녹수는 경기로 선발되어 서울에 올라온 뒤 제안대군의 집에 머물며 술시중을 들고 있었을 것이다.

 

▶ 연산군과 장녹수의 만남

 

연산군이 장녹수를 만난 것은 즉위 8년째인 1502년(연산군 8년) 제안대군의 저택이었다. 연산군은 일찍이 아버지 성종에게 왕위를 빼앗겼던 예종의 둘째아들 제안대군의 집에 드나들었다. 제안대군은 왕위에 다가갔던 종실들의 최후를 직시한 듯 평생 한량으로 살면서 대궐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연산군은 이런 모자의 처지가 폐비 윤씨와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느꼈던지 종종 미행을 나가 숙부와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그 과정에서 연산군은 빼어난 음률과 교태를 자랑하던 장녹수를 만났던 것이다.

 

▶ 장녹수의 외모와 매력

 

장녹수의 외모는 연산군 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장녹수의 나이는 서른 살 남짓으로 아들까지 하나 있었지만 외모가 방년 16세 처녀처럼 어려 보이는 동안이었고, 목소리가 맑고 청아했다. 그녀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한 연산군은 즉시 궁궐로 데려가 종4품 숙원(淑媛)에 봉했다. 따지고 보면 비천한 노기에 불과했던 장녹수가 하루아침에 왕의 후궁으로 변신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장녹수는 자신에게 다가온 행운을 십분 이용했다. 미색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특유의 교태를 발휘하여 연산군을 침실에 끌어들였고, 어린 시절부터 모성에 굶주렸던 연산군에게 여항의 어머니들처럼 대해줌으로써 마음의 빈칸을 채워주었다. 그 대가로 장녹수는 이듬해 종3품 숙용(淑容)으로 품계가 올랐고, 언니 장복수와 아들이 면천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 실정과 사치의 대명사 진실인가?

이 평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할 것은 역사는 승자의 기록물이라는 것이다. 우선 난봉꾼 이미지인 연산군의 평가도 사실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록에는 1만 명에 이르는 흥청이 대궐에 출입했다고 하는데 이는 백제 의자왕의 삼천궁녀설 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최근 소장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흥청은 태평성대를 기리기 위한 여성가무악대였다. 연산군은 호색한으로서 미녀를 탐했던 것이 아니라 낭만적인 절대군주로서 궁중의 여악을 강화했던 것이다. 그런데 후세에 흥청은 분수를 잃고 풍류에 빠져들었다는 뜻의 ‘흥청망청’이란 말로 변질되었다.

 

특히 연산군의 대표적인 사화인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서 두드러진다. 갑자사화의 와중이었던 1504년(연산군 10) 4월 25일, 장녹수의 본가 담벼락에 한 여인이 익명서를 붙인 다음 노비 돌동에게 ‘이 글은 대궐과 관계있으니 떼어 가라’고 말했다. 당시 이극균, 이세좌, 윤필상 등을 불경죄로 치죄하던 연산군은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자신을 적대시하는 궁인들의 소행이라고 판단했다.

 

얼마 뒤 과연 궁인 전향과 수근비 등이 잡혀오자 연산군은 두 사람을 귀양 보냈다가 능지처참한 뒤 수급을 궁중에 효수했다. 이는 분명히 갑자사화에 관련된 사건인데 사관은 아름다운 두 여인을 시기한 장녹수의 참소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505년(연산군 11년)에는 12월 운평 옥지화가 장녹수의 치마를 밟았다는 이유로 군기시 앞에서 참형을 당했고, 그 머리를 취홍원과 뇌영원에 돌려 보인 다음 연방원에 효시했다는 사관의 기록 또한 연산군의 광태를 부각시키면서 장녹수의 권력 남용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사실 장녹수는 관리들의 청탁을 들어주거나 나라의 선박을 이용해 평안도의 미곡을 무역하여 재물을 모았을 뿐이다. 연산군 말년에 정3품 당상관에 임명된 형부 외에는 쓸 만한 친척도 없어서 정사에는 관여하지도 않았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폭군에게는 간사한 신하와 요사스런 여인이 필수적인데 연산군에게는 임사홍과 장녹수가 바로 그 역할이었다. 당시 연산군의 총애를 받은 후궁으로는 장녹수 외에도 후궁 전전비나 김귀비 등이 있었다. 그런데 사관은 오로지 장녹수만을 집중 공격하고 있다. 비천한 창기 출신의 후궁이 득세하는 꼴이 그들에게는 눈 뜨고 보지 못할 일이었을 것이다.

 

▶ 장녹수의 죽음

 

1506년 8월 23일, 후원에서 풀피리를 불던 연산군은 문득 ‘인생은 풀잎 이슬과도 같아서, 우리 만날 날이 많지 않구나.’라고 탄식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장녹수와 전전비가 눈물을 머금었다. 이는 총애하는 여인들과 태평성대를 오래 누리지 못함을 애석해하는 제스처였지만 실록의 사관은 그가 곧 파국을 예감한 것처럼 그려놓았다.

 

운명의 9월 2일 드디어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반란의 핵심 세력은 두 차례의 사화로 원한을 품은 사림이 아니라 어제까지 충성을 다짐하던 조정 신료들이었다. 그들은 사림세력이 거사를 결행하면 제일 먼저 숙청될 인물들이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연출되자 낙심한 연산군은 저항을 포기했다.

 

이윽고 대궐을 장악한 반군들은 연산군을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한 다음, 장녹수와 전전비, 김귀비 등을 군기시(軍器寺) 앞으로 끌고 가 참형에 처했다. 그들의 선동에 흥분한 백성들은 그녀의 시체에 돌멩이를 던졌다. 비천한 기생에서 정3품 소용(昭容)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장녹수의 성공신화는 그렇듯 비극적인 최후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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