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 뜻과 조선 4대 사화

 

사화(士禍)는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화를 입는 일을 가리키며, 한국사에서는 특히 조선 중기에 사림 세력이 화를 당한 연산군 때부터 명종 즉위년까지 발생한 4차례의 옥사를 말한다. 이들 사화는 1498년(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 1504년(연산군 10년)의 갑자사화, 1519년(중종 14년)의 기묘사화, 1545년(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4대 사화’라고 부른다.

 

기묘사화(己卯士禍) 요약


1519년(중종 14) 11월 남곤·심정·홍경주 등의 재상들에 의해 조광조·김정·김식 등 사림이 화를 입은 사건. 중종 즉위 이후 정국을 주도한 훈구파에 대해 신진 사림파들이 정계에 진출해 세력을 늘려가면서 갈등을 일으켰다. 특히 사림파들은 중종반정의 공신 중 공이 없음에도 공신이 된 자들을 속아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일부 관철시켰다.

 

그러자 훈구파들은 사림파들이 붕당을 지어 왕권을 위협하고 국정을 어지럽힌다고 고해 중종은 이를 수용해 사림파들을 숙청했다. 결국 기묘사화는 사림이 주도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기득권자인 공신재상들의 반격으로 야기된 정치적 사건이었고 이후 훈구파가 다시 정계의 중심이 되었으나 사림의 대세는 막을 수 없었다.

 

 

■ 기묘사화 원인과 배경

 

신진 사림의 등장과 시대적 배경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고 성균관을 중수하였으며, 두 차례의 사화로 희생된 사람들을 신원(伸寃)하고, 명망 있는 신진 사림파를 등용하였다. 중종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공신세력의 독주를 저지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으로서 사림을 주목했다. 그러한 배경에서 일시 물러났던 사람들이 대거 중앙정치에 등장했다.

 

이들은 조광조 등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왕도정치 이념에 입각한 개혁을 추진했다. 중종의 지지를 얻은 조광조와 신진 사류들은, 성리학에 의거한 이상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먼저 중종에게 철인군주주의(哲人君主主義) 이론을 가르치면서, 군자를 중용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할 것을 역설하였다.

 

나라의 미풍양속을 기르기 위하여 미신타파와 향약(鄕約)실시를 강행하고, 유익한 서적을 국가에서 간행 ·반포하게 하였으며,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여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도록 하였다. 현량과는 성품, 기국, 재능, 학식, 행실과 행적, 지조, 생활 태도와 현실 대응 의식 등 7가지 항목을 종합하여 인재를 천거하고 그들을 궁궐 뜰에 모아 왕이 참석한 자리에서 대책(對策)으로 시험보고 인재를 선발하는 방식으로 과거의 별시로 치러졌다. 이를 통해 새로운 신진 사림들이 등용되어 정치에 새바람을 몰고 왔다.

 

신진 사림파와 훈구파의 갈등

 

그러나 뜻을 달리하는 문인의 사장(詞章)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고 오직 도학사상만을 강조하였고, 특히 훈구파를 소인으로 지목하여 철저히 배척하며, 갈등이 일어났고 당면 정치현실을 무시하고 급진 정책을 시행하는 등 지나친 이상주의를 펼쳤다. 특히 발단이 된 사건은 중종반정으로 공신 117명이 선정된 가운데 76명은 뚜렷한 공로도 없이 공훈을 남수(濫授)하였으니 이들을 공신에서 삭제하여 작위를 삭탈하고 그들의 전답과 노비 등도 모두 국가에 귀속해야 한다는 위훈삭제(僞勳削除)사건을 야기시켰다.

 

사화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519년(중종 14)에 다시 가열된 중종반정공신의 위훈삭제(僞勳削除) 문제였다. 사림은 일찍부터 이 문제를 주목하여 공이 없이 공신에 책봉된 사람들을 훈적(勳籍)에서 삭제할 것을 건의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그러나 사림의 힘이 커지면서 1519년에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여 마침내 공신의 3/4에 이르는 76명의 공신호를 삭탈하고 그들에게 분급한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게 했다.

 

훈구파의 전횡에 시달린 신진세력들은 조광조의 이러한 개혁정책에 환영하였지만 훈구파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고 특히 중종은 임금의 권위마저 압박해오는 것으로 받아들여 조광조와 신진 사류들을 경계하게 되었다.


기묘사화의 전개

 

신진 사류와의 알력과 반목이 날로 커져가는 가운데 정면 도전을 받은 훈구파는, 홍경주의 딸이 중종의 후궁인 희빈 홍씨를 통해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고 과장하면서 그대로 둘 경우 왕권까지 위태롭게 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특히 궁중 동산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의 4자를 쓴 뒤, 이것을 벌레가 갉아먹어 글자 모양이 나타나자, 그 잎을 왕에게 보여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였다.

 

‘走 ·肖’ 2자를 합치면 조(趙)자가 되기 때문에, 주초위왕은 곧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남곤 ·심정(沈貞) ·홍경주 등 훈구파의 사주도 있었지만, 중종은 점차 신진 사류의 급진적 ·배타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위훈삭제 사건이 중종반정을 반역사건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의심하게 되었고 중종은 결국 훈구파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광조와 신진사류를 몰아내었다.

 

기묘사화의 결과

 

조광조는 능주(綾州)로 귀양가서 한달만에 사사되고, 김정(金淨) ·기준 ·한충 ·김식 등은 귀양갔다가 사형되었다. 김구 등 수십명도 역시 유배되고, 이들을 두둔한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 등은 파직되었다. 사림파의 몰락으로 현량과는 폐지되었고 공신에서 삭탈된 훈구파들은 모두 복훈되어 빼앗겼던 재산을 모두 되찾았다. 후일 이때 희생된 사람들을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지만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조광조가 성급했다고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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