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사임당 생애와 예술세계에 앞서

 

신사임당(申師任堂) : 1504~1551

 

현모양처로 널리 알려진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류예술가입니다.
신사임당은 시(詩)ㆍ서(書)ㆍ화(畵)에 모두 뛰어나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예인(藝人)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 신사임당 생애

 

신사임당

 

 

출생과 성장

 

신사임당의 삶은 아들인 이이가 기록한 〈선비행장(先妣行狀)〉이라는 글을 통해서 비교적 자세히 전해진다. 그 기록에 따르면 신사임당은 1504년(연산 10) 음력 10월 29일에 외가가 있는 강원도 강릉에서 신명화와 용인 이씨의 다섯 딸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호는 사임당(師任堂)이다. 사임당은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겠다는 뜻에서 사용된 당호로 임사재(任師齋)라고 칭하기도 했다. 본명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름이 인선(仁善)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자료는 없다.


신사임당은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외조부인 이사온의 총애를 받아 그에게 학문과 시(詩)ㆍ서(書) 등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특히 그녀가 그림에 재능을 보이자 외조부 이사온이 안견(安堅)의 그림을 구해다 주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이의 〈선비행장〉에는 신사임당이 7세 때에 안견의 그림을 모방해 산수도(山水圖)를 그렸는데, 그때 이미 매우 절묘한 솜씨를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경전(經傳)에 능통하고 글도 잘 짓고 글씨도 잘 썼으며, 바느질과 자수까지 정묘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아버지 신명화는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의 참화는 면하였다. 외할아버지 이사온이 어머니를 아들잡이로 여겨 출가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도록 하였다. 이에 사임당도 외가에서 생활하면서 어머니에게 여범(女範)과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婦德)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났다.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는 아버지와는 16년간 떨어져 살았고, 그가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다.

 

오죽헌

 

▶ 결혼과 죽음

 

1. 신사임당의 결혼과 생활

 

19세에 덕수 이씨(德水李氏)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하였다. 사임당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였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결혼 몇 달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다. 얼마 뒤 선조 때부터 시집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했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

 

여자가 출가한 뒤에는 오직 시집만을 위하도록 요구한 유교적 규범 속에서도 친정을 그리워하고 친정에서 자주 생활한 것은 규격화된 의리의 규범보다 순수한 인간 본연의 정과 사랑을 더 중요시한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예술 속에서 나타나듯이 거짓없는 본연성을 정직하면서 순수하게 추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술성을 보다 북돋아준 것은 남편이었다. 사임당이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량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남편은 사임당의 그림을 친구들에게 자랑을 할 정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또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또 그는 아내와의 대화에도 인색하지 않아 대화에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임당의 시당숙 이기(李芑)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남편이 그 문하에 가서 노닐었다. 이기는 1545년(인종 원년)에 윤원형(尹元衡)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에게 크게 화를 입혔던 사람이다.

 

사임당은 남편에게 어진 선비를 모해하고 권세만을 탐하는 당숙의 영광이 오래 갈 수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권하였다. 이원수는 이러한 아내의 말을 받아들여 뒷날 화를 당하지 않았다.

 

신사임당

 

2. 신사임당의 죽음

 

1541년(중종 36) 38세에 시집 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떠나왔으며, 수진방(壽進坊: 지금의 종로구 壽松洞과 淸進洞)에서 살다가 1551년(명종 6) 봄에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 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신사임당은 죽은 뒤에 파주 두문리(斗文里)의 자운산(紫雲山)에 매장되었다. 현재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 뒤편에 있는 율곡 이이의 가족묘역에는 율곡 이이의 묘역 아래에 신사임당과 남편 이원수의 합장묘가 있다. 율곡 이이의 가족묘역은 자운서원 등과 함께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525호로 지정되어 있다.

 

■ 신사임당의 예술세계

 

신사임당은 시(詩)ㆍ서(書)ㆍ화(畵)에 모두 뛰어나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예인(藝人)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하지만 아들인 이이의 영향으로 그녀가 조선 중기 이후 현모양처(賢母良妻)의 전형으로 여겨지면서 그녀의 글씨와 그림을 상찬하는 유학자들의 글은 많이 전해지지만, 막상 그녀가 직접 쓰고 그린 글씨와 그림으로 확인되는 작품들은 매우 드물다. 그리고 그녀의 영향으로 조선 후기에 풀ㆍ벌레를 그린 초충도(草蟲圖)가 크게 유행했다. 그래서 오늘날 그녀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것들은 진작(眞作)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전칭작(傳稱作)들이 대부분이다.

 

사임당이 절묘한 경지의 예술 세계에 머문 중요한 동기는 환경이었다. 즉 첫째 현철한 어머니의 훈조를 마음껏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가졌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둘째는 완폭하고 자기주장적인 유교 사회의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그러한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의 남편은 자질을 인정해 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 넓은 사나이였다.

 

신사임당 예술세계

 

 

오늘날 신사임당의 그림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것들은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묵포도도(墨葡萄圖)〉, 〈노련도(鷺蓮圖)〉, 〈어하도(魚鰕圖)〉 등이 있다. 안견과 중국 명나라 초기의 산수화 유파인 절파(浙派)의 영향이 드러나는 〈산수도〉는 대담하고 간결한 구도로 산수를 묘사하면서도 여성 특유의 섬세한 표현 기법이 동시에 나타난다. 강릉의 오죽헌박물관에 있는 〈신사임당초충도병(申師任堂草蟲圖屛)〉에는 8폭의 초충도가 전해진다.

 

여기에는 오이와 메뚜기, 접시꽃과 잠자리, 수박과 여치, 가지와 사마귀, 맨드라미와 개구리, 양귀비와 풀거미, 봉숭아와 잠자리, 원추리와 벌이 섬세한 필치와 구도로 그려져 있다. 이 밖에도 조선 후기 이후에 제작된 화첩 등에 신사임당의 것으로 수록되어 있는 그림들이 다수 전해진다.


사임당의 자녀들 중 그의 훈도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것은 셋째 아들 이이(李珥)이다. 이이는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했는데, 그는 여기에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효(純孝)한 성품 등을 소상히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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