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이융

 

우리가 아는 연산군은 폭군, 상선 김처선을 잔인하게 죽인 왕, 장녹수에 빠진 왕 등이다. 이전의 왕과 달리 학문을 멀리하고 향략과 사치에 빠진 왕이다. 연산군 이융은 조선 10대 왕으로 두 번의 사화로 조정에 피바람을 일으켰다. 또한 경연을 없애고 사간원마저 없애는 등 폭정이 극에 달했으며 결국 중종반종으로 폐위되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불행의 씨앗을 품고 태어난 연산군의 어린 시절, 그가 꿈꾼 절대왕권과 유교사상, 조선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연산군의 향략과 폭정, 중종 반정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겠습니다.

 

연산군 무덤 사적 제 362호

 

■ 불행의 씨앗을 품은 연산군의 유년 시절

 

1476년(성종 7) 11월 7일 조선의 9대 왕인 성종의 맏아들(적장자)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후궁이었다가 성종의 총애를 받아 왕비에 오른 윤씨이다. 당시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는 성종(成宗)의 첫번째 후궁이었으며 이후 연산군을 잉태하면서 비(妃)로 책봉되었다. 이름은 이융(李㦕)이고 7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다.

 

성종은 원자의 모후를 폐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에도 두 번째 왕비였던 윤씨를 폐위시켰다. 그리고 어린 원자가 자신의 어머니가 폐위되고 사사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렸다. 그래서 세자 융은 성인이 되어 왕위에 오를 때까지 생모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알지 못하고 성종의 세 번째 왕비인 정현왕후 밑에서 자랐다.

 

윤씨를 쫓아낸 장본인인 할머니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 역시 마음의 짐 때문인지 손자인 연산군에게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이래저래 연산군은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 연산군이 꿈꾼 절대왕권

 

연산군은 조선왕조의 어떤 왕과도 성격이 다른 인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조선의 통치이념인 유교 윤리를 거부했으며,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절대 권력을 추구했다. 이런 태도는 유교 사상에 경도되어 있던 신료들과 필연적으로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유교적 이상주의 국가를 꿈꾸던 사림들과는 더욱 갈등이 심했다. 연산군은 두 번의 사화를 통해 자신을 귀찮게 괴롭히던 사림들을 제거하고 절대 왕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에게는 신하인 양반에게 쫓겨나는 최조의 왕이 되었다.

 

■ 조선 최초의 두번의 사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두 번이 사화를 전체적인 내용보다는 간략한 정보와 결과 위주로 포스팅합니다.

 

  • 무오사화(1498) : 훈신이 사림을 몰아낸 사화로 훈신인 이극돈과 유자광이 주도하였다. 무오사화를 계기로 성종 조 이후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떠오르던 사림파는 크게 위축되었고, 조정에는 연산군에게 아부하며 치부하기에 바쁜 무리들만 남았다. 비판과 견제를 담당할 사람이 사라진 조정에서 연산군은 그야말로 절대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연산군과 갈등을 빛으며 왕권을 견제했던 삼사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 갑자사화(1504) : 생모인 폐비 윤씨 사사에 관한 사화로 사림보다 오히려 다수의 훈신들이 화를 당한 사건이다. 이 사화를 주도한 인물은 임사홍과 신수근이었다. 갑자사화 당시 연산군은 패륜적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폐비 윤씨의 사사에 빌미를 제공하고 실질적으로 주도했다는 혐의로 성종의 후궁인 숙의 엄씨와 숙의 정씨, 할머니인 인수대비까지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이로써 연산군은 자기 분에 못 이겨 부왕의 후궁들과 친할머니까지 제 손으로 죽인 패륜아가 되었다.

 

 

■ 연산군의 폭정과 향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권력을 독점한 연산군과 궁중파들의 학정은 날로 심해졌다. 먼저 연산군은 홍문관과 사간원을 혁파하고 사헌부의 지평 2원(員)을 없애 언로(言路)를 막았다. 또한 정치 논쟁을 막기 위해 경연도 폐지했으며, 학문의 전당인 성균관을 기생과 어울리는 장소로 만들었다. 그리고 혹시 자신의 뜻을 거스르거나 자기의 잘못을 비난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차 없이 죄를 물어 참형에 처했는데, 죽을 각오를 하고 직언을 한 환관 김처선(金處善)은 직접 활을 쏘아 죽이기까지 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김처선의 이름에 들어간 '처(處)' 자를 쓰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려 절기 중 하나인 '처서(處暑)'를 '조서(徂暑)'라고 바꾸기도 했다.

 

특히 연산군은 장녹수(張綠水)라는 궁녀에게 빠져 놀아났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전횡을

그러나 연산군이 장녹수에게만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궁인과 기생은 물론이고 여염집 아녀자들까지 거침없이 희롱했으며, 심지어 친족과 간음하는 등 패륜적 행위를 불사했다. 또한 전국에서 운평(가무를 담당하던 기생)을 뽑아 대궐에 들여 '흥청(興淸)'이라고 하고, 밤낮으로 풍악을 울렸다. 여기에서 '흥청거리다'라는 말이 유래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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