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대한민국 여자 부자/재산 순위

 

2019년 대한민국에서 여성의 힘을 느낄 수 있는

대한민국 여자 부자/재산 순위 TOP5

우선 결론부터 아래 이미지로 확인하세요.

 

2019년 대한민국 여자 부자/재산 순위 TOP5

아마도 TOP3에 있는 순위는

누구나 짐작하고 알 수 있는 순위입니다.

삼성가에서 대한민국 여자 부자/재산 순위는 독식입니다.

 

그리고 # 표시는 대한민국 전체 부자/재산 순위입니다.

대한민국에서 TOP5 부자/재산 순위라면

30위 권 이내라는 의미 이기도 합니다.

 

TOP4(대한민국 25위)

Chey Ki-won is the younger sister of SK Group Chairman Chey Tae-Won

굳이 번역을 하지면 최태원 회장님 Sister입니다.

 

TOP5(대한민국 30위)

치토스와 오리온 쵸코파이로 유명한

오리온이네요.

 

 

 

2019 대한민국 부자/재산 순위 TOP10

 

오랫만에 대한민국 부자/재산 순위를 게재합니다.

늘 보던 분도 있고, 갑자기 등장하신 분도 있습니다.

대한민국 부자/재산 순위는 언제나 그자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부자/재산 순위 TOP1~5

대한민국 부자/재산 순위 TOP1~5

1~5위 순위표에 낳설은 분 서정진 회장님입니다.

생물의약 회사로 알려진 셀트리온 CEO입니다.

언제나 보던 회사와 인물이 아닌데 등장한 것으로 보면

갑작스런 대박이 있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물론 제가 이 회사에 대해 잘 몰라 더 이상 설명은 하지 않습니다.

제 소견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이렇게 새롭게 등장하는 회사와 인물이 있다는 것은

그래도 아직 대한민국이 역동적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대한민국 부자/재산 순위 TOP6~10

대한민국 부자/재산 순위 TOP6~10

6위~10위 순위를 보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분이 많습니다.

이 중 9위와 10위에 랭크된

방정혁(넷마블, 게임회사), 임성기(한미약품 창업자)

두 분 회장님입니다.

 

대한민국 부자/재산 순위 TOP10은

전통적인 의미의 회사(그룹)와 게임, 약품 회사가 잘 어우러진 모양입니다.

다음번엔 세계부자 순위를 연재하겠습니다.

■ [역사상식] 흥선대원군과 척화비


▶ 흥선대원군(이하응(李昰應, 1820~1898)) 집권 


조선 제 26대왕 고종의 아버지로 외국 문물에 반대하는 쇄국정책을 실시한 정치가. 본관은 전주, 자는 시백, 호는 석파, 해동거사이며 1863년 12월 철종이 죽자 둘째 아들 명복(고종의 아명)이 조대비에 의해 왕위에 오르면서 흥선 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아들 고종의 즉위로 조선역사상 유일하게 왕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었으면서 살아 있는 왕의 아버지로 대원군에 봉해지고,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는 섭정을 맡게되었다.  


10년간의 집권을 통해 왕권 강화를 꾀하면서 체제의 내적 개혁으로 봉건제 해체의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그의 개혁 정치는 일시적으로 내부적 모순을 완화시키고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았다. 이후 조선 사회는 급격히 해체되었고 외세의 침략도 심화됨으로써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왕권강화와 체제정비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대외정책으로는 쇄국정책을 하였다. 그에 두드러진 대외정책에 대해 알아보자. 물론 이 쇄국정책에 대해서 호불호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1866년 8월 천주교도 박해를 구실로 쳐들어온 프랑스 군대를 격파한 병인양요를 겪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대원군은 외국인에 대해 더욱 적개심을 가졌다. 그러한 가운데 1868년 4월 E. 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德山)에 침입하여 군아(郡衙)를 습격하고, 이어 가동에 있던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사건이 일어났다(남연군 분묘 도굴사건). 


이로써 대원군의 외국인 배척사상은 굳어지게 되었다. 1871년 4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미국 함대가 쳐들어와 덕진진(德津鎭)과 광성보(廣城堡)를 점령하자, 서울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결사항전을 준비했다. 조선정부가 외교교섭에 응하지 않고 전투가 장기화되자 미국 함대는 그해 5월 철수했다. 


일본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후 근대적 조약 체결을 요구했으나 대원군은 왜양일체(倭洋一體)라는 입장에서 이를 거절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이 일단 저지되었으나, 이후 더욱 강화된 쇄국정책으로 인해 조선은 세계사에 자주적으로 합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 흥선대원군의 하야와 재기 기도 


흥선대원군은 외척세도를 봉쇄하기 위해 보잘 것 없는 가문 출신인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고종의 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민비는 척족을 규합하고 대원군 반대세력을 결집하여 대원군 축출을 추진했다. 이에 1873년 최익현(崔益鉉)이 대원군의 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한 상소를 계기로 11월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자 대원군은 정계에서 물러나 양주에 은거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계 복귀를 꾀했다. 1880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가져온 〈조선책략 朝鮮策略〉의 반포를 계기로 이듬해 전국 유생들의 척사상소운동(斥邪上疏運動)이 전개되었는데, 그때 승지 안기영(安驥永) 등이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 재선(載先)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사전에 누설되어 처형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에 흥선대원군이 관련되었으나, 국왕의 아버지라 하여 불문에 붙여졌다.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고종에게 사태수습을 위한 전권을 위임받자, 이 기회에 정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즉 대원군은 궁궐에서 도망쳐나간 민비가 죽었다고 공포한 후 무위영(武衛營)·장어영(壯禦營)·별기군(別技軍)을 폐지하고 5군영을 복설했으며,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삼군부를 복설하는 등 반개화정책을 폈다. 그러나 곧 흥선대원군은 민씨정권의 요청을 받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청나라 톈진[天津]으로 납치되었고, 이어 바오딩부[保定府]로 옮겨져 유폐생활을 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이런 행동들은 아들 고종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1895년 고종은 대원군의 정치활동을 대부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해 그의 바깥 활동을 막았다. 사실상 유폐나 다름없는 생활 속에서도 흥선대원군은 정계복귀를 꿈꾸었으며 만년의 그의 헛된 꿈은 며느리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을미사변)과 관련해 일본 공사 미우라에게 이용당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을미사변 이후 대원군은 또다시 잠시 정권을 잡지만 신변에 위험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하여 친러파가 대두하면서 축출되었다.


3년 후인 1898년 흥선대원군은 7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1907년(광무 11) 대원왕(大院王)에 추봉(追封)되었다. 19세기 후반 격변하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조선의 정치사를 관통했던 흥선대원군은 그의 정치적 공과를 떠나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것에는 틀림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10년간의 집권기를 통해 왕권강화를 꾀하면서 체제의 내적 개혁으로 봉건제 해체의 위기를 극복하려 했으며,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해서는 위정척사적 입장에서 국력을 모아 강력하게 대응했다. 그의 개혁정치는 일시적으로 내부적 모순을 완화시키고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모두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았다. 


 이후 조선사회는 더욱 급격히 해체되었고 외세의 침략도 더욱 심화됨으로써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하게 되었다. 1907년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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