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시감과 데자뷔 뜻

 

기시감(旣視感, 프랑스어: Déjà Vu 데자뷔) 은 처음 보는 대상이나, 처음 겪는 일을 마치 이전에 보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상한 느낌이나 환상을 말한다.

 

▶ 데자뷔

 

데자뷔는 프랑스어로 "이미 본” 이란 뜻으로 최초의 경험인데도 불구하고, 과거에 이와 같은 경험을 경험한 것 같은 착각을 일컫는 말이다. 인간의 뇌는 일상생활에서 엄청난 양의 기억을 저장하는데, 이 엄청난 양의 기억을 저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인간의 뇌는 일상생활에서의 기억을 간략하게 저장하는데, 간략하게 저장된 엄청난 양의 정보는 비슷한 기억이더라도 인간의 뇌는 같은 기억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생긴다는 견해가 있다.

 

보통 데자뷔 현상을 겪은 사람들은 대부분 꿈속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데 이것을 데자뷔 현상이라고 한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심리학자인 플로랑스 아르노(Florance Arnaud)가 최초로 이러한 현상을 규정하고, 이후 에밀 부아라크(Emile Boirac, 1851∼1917)이 데자뷰란 단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또한 그는, 데자뷔 현상은 과거의 망각한 경험이나 무의식에서 비롯한 기억의 재현이 아닌, 그 자체로서 이상하다고 느끼는 뇌의 신경화학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또 다른 학설은 무의식에 의한 행동이나 망각된 기억이 뇌에 저장되어 있다가 그것이 유사한 경험을 만났을 때, 되살아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사람의 뇌는 엄청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서 스치듯이 한번 본 것도 잊어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뇌세포 속에 저장하는데, 이런 세포 속의 정보들을 모두 꺼내는 것은 아니고 자주 보고 접하는 것들만 꺼내보지만, 뇌는 훨씬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무의식중에 했던 일을 다시 하거나 방문했던 곳에 갔을 때, 처음 하는 일 같은데 아련히 똑같은 일을 한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 미필적 고의와 무고죄

 

▶ 미필적 고의란?

 

고의의 지적 · 의지적 요소가 가장 위축된 형태의 약한 고의로서, 행위자가 객관적 구성요건의 실현가능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또한 그것을 감수하는 의사를 표명한 경우를 말한다. 예컨대, 인화물질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이 나도 좋다고 생각하고 담배를 피우다가 화재가 발생한 경우이다.

 

이러한 미필적 고의는 가장 불확정적인 고의의 형태이므로 과실, 특히 인식 있는 과실과의 구별이 모호하다. 그러나 고의와 과실은 형벌의 경중에서도 커다란 차이가 있으므로 그 구별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이 제시되고 있다.

 

판례는 행위자가 결과발생의 가능성을 인식하면서도 이를 용인(容認)한 경우는 미필적 고의이고, 용인하지 않은 경우는 인식 있는 과실이 된다고 한다. 즉 미필적 고의가 성립하려면 결과발생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인화물질 근처에서의 흡연은 위험하다는 인식)이 있음은 물론, 나아가 결과발생을 용인하는 내심의 의사(화재가 발생하여도 어쩔 수 없다는 범의)가 있음을 요한다(대판 1987.2.10, 86도2338).

 

▶ 미필적 고의 사례

 

예컨대, 보험금을 탈 목적으로 밤에 자기의 집에 방화(放火)할 때에 혹시 옆집까지 연소(延燒)하여 잠자던 사람이 타죽을지도 모른다고 예견하면서도, 타죽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방화한 경우와 같다. 미필적 고의는 불확정적 고의의 하나이다. 앞의 예에서 보험금 사취(詐取)를 위한 방화에 대해서는 확정적 고의가 있으나, 그로 인한 옆집 사람의 연소사(延燒死)의 결과에 대해서는 미필적 고의가 있게 된다. 미필적 고의는 고의와 과실의 중간영역에 위치하는 인식 있는 과실과의 구별이 어렵다.

 

앞의 예에서, 방화로 인하여 옆집에 연소함으로써 잠자던 사람이 타죽을지도 모른다고 예견한 점에서는 미필적 고의와 인식 있는 과실이 공통하지만, 다만 타죽어도 할 수 없다고 인용한 심리상태는 미필적 고의가 되고, 아직 초저녁이어서 깊이 잠들지 않아 곧 깨어나서 타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고히 믿는 심리상태는 인식 있는 과실이 된다고 이론상 일단 이렇게 구별되지만 실제상 그 입증은 어렵다. 미필적 고의가 있는 경우, 앞의 예에서는 살인죄의 책임을 지게 되고, 인식 있는 과실이 있는 경우에는 과실치사(過失致死)가 되어 형이 가벼워진다.

 

 

▶ 무고죄란?

 

타인으로 하여금 형사처분 또는 징계처분을 받게 할 목적으로 공무소 또는 공무원에 대하여 허위의 사실을 신고한 범죄이다(형법 제156조). ‘타인’이란 자기 이외의 자를 말한다. 따라서 자기 자신이 처벌받을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신고하였을 때는 본죄는 성립하지 않는다. 타인은 반드시 현존함을 요한다. 사자 또는 가공인물과 같은 실존하지 않는 자에 대하여 허위신고를 하였을 경우에는 단순히 「경범죄 처벌법」 제3조3항2호에 의하여 처벌됨에 불과하다.

 

그러나 타인에는 법인 또는 법인격 없는 단체 등도 포함된다. 또 피무고자인 타인은 반드시 형사처분 또는 징계처분을 받을 적법성을 구비함을 요하지 않는다. 형사미성년자 또는 징계처분을 받을 신분(공무원) 없는 자에 대하여도 본죄는 성립한다. ‘형사처분 또는 징계처분을 받게 할 목적’으로 하여야만 하므로 본죄는 목적범이다. 따라서 형사처벌 또는 징계처분을 받았는가는 본죄의 성립에 영향이 없다. 징계처분은 특별권력관계에 기인한 징계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명칭을 묻지 않고 일체의 징계처분을 포함한다. ‘공무소 또는 공무원’이란 형사처분 또는 징계처분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해당 관서 또는 관헌 및 그 보조자와 감독자를 말한다.

 

‘허위의 신고’란 객관적 사실에 반하는 사실을 신고하는 것을 말하며, 해당 관청이 잘못된 직권발동을 함에 족할 정도의 구체성을 가진 사실을 신고한 것이 아니어야 하고, 그 신고내용에는 처분을 요구하는 취지를 명시할 필요가 없다. ‘신고’는 허위임을 인식하고 자진하여 하여야만 한다. 관청의 추문에 대하여 허위의 진술을 하였더라도 반드시 본죄가 성립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신고방법은 구두이거나 서면이거나 혹은 고소 · 고발의 방식에 의하거나 익명에 의하거나를 불문한다.

 

신고의 방식에는 제한이 없어 구두(口頭), 서면, 고소·고발, 진정서의 형식 및 기명(記名), 익명(匿名), 자기명의, 타인명의에 의하건 상관없다. 이 죄를 범한 자(10년 이하 징역 또는 1500만 원 이하의 벌금)가 그 신고한 사건의 재판 또는 징계처분이 확정되기 전에 자백 또는 자수한 때에는 그 형을 감경(減輕) 또는 면제한다(157조).

 

 

 

■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이란?

 

대륙간탄도미사일은 대륙간탄도탄이라고도 한다. 미국보다 러시아가 먼저 1957년 8월에 개발하였고, 미국은 59년에 실용화하였다. 일반적으로 5,000km 이상의 사정거리를 가진 탄도미사일을 말하며, 보통 메가톤급의 핵탄두를 장착하고 있다. 다른 대륙에 있는 적의 시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영어로는 '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이라 하며 흔히 약자인 ‘ICBM’으로 부른다. 적의 군사적, 경제적 기반을 공격하는 전략무기체제의 하나로 핵탄두를 장착하여 먼 거리에 있는 적의 시설을 공격한다. 전략핵무기 중에서도 발사준비에 걸리는 시간이 짧고 위력적인 것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의 특징이다. 전략탄도미사일 중에서 사거리가 960~5,500km 정도로 ICBM보다 좁은 범위를 요격하는 미사일은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Intermediaterange Ballistic Missile)'이라 한다. 핵잠수함에서 발사하는 미사일은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Submarine-Launched Ballistic Missile)이라 한다.

 

▶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 역사

 

탄도미사일의 시초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나치가 개발한 'V-2'로 알려졌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관련 기술을 입수한 미국과 소련이 탄도미사일 개발을 시작했다. 소련은 1957년, 미국은 1959년에 대륙간탄도미사일인 'R-7'과 ‘아틀라스' 미사일을 각각 개발했으나 발사 준비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등의 한계가 있었다. 1960년대에는 수소폭탄을 장착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등장했다. 1970년대 미국에서는 하나의 대륙간탄도미사일에 다수의 핵탄두를 탑재한 MIRV(Multiple Independently-targetable Reentry Vehicle)이 개발되었다. MIRV는 여러 핵탄두를 가지고 있어 다수의 목표 지점을 동시에 공격할 수 있다. 1980년대는 소련의 토폴-M(Topol-M)과 같은 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도 만들어졌다.

 

 

▶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 특징

 

액체·고체 연료를 사용한 다단식(多段式) 로켓으로 1,500∼3,500km의 고공에 쏘아 올려지고, 400∼500km의 거리에서 레이더에 의한 제어가 가해지면 엔진의 가동이 중단되고, 그 이후는 속도벡터에 의해 역학적으로 결정되는 탄도(彈道)를 비행하여 목표에 도달한다. 다른 탄도미사일과 마찬가지로 발사된 후 포물선 궤도를 그리며 떨어진다. 탄도미사일은 날아가면서 속도와 고도가 바뀌는 미사일이다. 탄도(彈道)란 발사된 탄환이 목표에 이르기까지의 궤적을 말한다. 탄도미사일은 로켓을 엔진으로 사용한다. 로켓은 순간적인 폭발력이 뛰어난 대신 연료소모가 심해 오랜 시간 추진이 불가능하다. 즉 발사된 미사일은 시간이 지나면서 고도가 떨어지기 마련이므로 멀리 있는 표적을 맞히려면 최대한 높게 발사해야 한다. 대륙간탄도미사일은 탄도미사일 중에서도 가장 먼 거리를 요격한다. 따라서 가장 높은 고도까지 올라가는데, 대기권을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탄도미사일은 떨어질 때 중력의 영향을 받아 충돌 직전에는 음속의 몇 배로 속도가 빨라진다. 따라서 적이 미사일을 발견하더라도 엄청난 속도로 인해 방어가 쉽지 않다. 미국은 이를 방어할 목적으로 대기권 밖에서 탄두가 떨어지기 전에 요격하는 GBI각주1) 미사일을 개발하기도 했다.

 

▶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 현황

 

2016년 기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운용하는 국가는 미국과 러시아, 중국, 인도 등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대륙간탄도미사일은 '미니트맨 III'라 불리는 'LGM-30 미니트맨(LGM-30 Minuteman)’이다. 미니트맨 III는 최대 3개의 핵탄두를 장착하고 13,000km 떨어진 장소를 폭격할 수 있는 ICBM이다. 러시아는 RT-2PM 토폴을 포함해 RS-24 야르스, RSM-56 불루바 등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가지고 있다. 2016년 러시아는 신형 ICBM인 'RS-28 사르마트'의 개발을 거의 완료했으며 시험 발사를 거쳐 2018년 실전 배치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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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인조반정 1623(광해군 15)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인조)을 왕으로 세운 정변. 광해군은 임진왜란 후 대북파를 기용하여 개혁적인 정책을 펴 나갔다. 그러나, 적자가 아니었던 광해군은 형제들을 죽이고, 대비를 유폐하였고, 오랑캐라고 할 수 있는 후금과 명에 균형외교를 유지하여 중화사상에 물든 서인들의 불만이 컸다.

 

서인세력은 사림을 규합해 선조의 손자 능양군을 왕위에 올리기로 하고 반정을 일으켰다. 당시 훈련대장 이흥립이 성문을 열어 반군을 맞아들여 반정은 쉽게 성공했다. 반정세력은 인목대비를 복권하고, 광해군을 폐위하고 능양군을 왕위에 올렸다. 또한 집권했던 대북파들을 처형하고, 자신들은 정사공신이 되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내정과 외교에서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다. 내정 면에서 왜란으로 인해 파괴된 사고(史庫) 정비, 서적 간행, 대동법 시행, 군적(軍籍) 정비를 위한 호패법의 실시 등 많은 치적(治績)을 남겼으며, 외교 면에서도 만주에서 크게 성장한 후금(後金)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국제적인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했다. 그러나 왕위를 위협할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동복형(同腹兄)인 임해군(臨海君)과 유일한 적통(嫡統)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했으며,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호를 삭탈하고 경운궁(慶運宮:西宮)에 유폐(幽閉)했다.

 

이러한 행위는 성리학적 윤리관에 비추어 패륜으로 여겨졌고, 명을 배반하고 후금과 평화관계를 유지한 것도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던 당시의 사림들에게는 큰 불만이었다. 그리하여 광해군이 즉위할 당시부터 정치권력을 잃었던 서인세력들이 그러한 사류(士類)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정변을 계획했다.

 

1620년부터 이서·신경진(申景禛)이 먼저 반정의 계획을 수립한 후 구굉(具宏)·구인후(具仁垕) 등을 끌어들이고, 이어 김유·이귀·최명길(崔鳴吉) 등의 문신과 연계하여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면서 1623년 3월 1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진행시켰다. 이 계획은 거사 직전에 이이반(李而攽)의 고변(告變)에 의해 누설되었지만 광해군이 후궁과 연회를 즐기느라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예정대로 추진되었다. 능양군은 직접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이서가 장단으로부터 통솔해온 700여 명의 군사와 연서역(延曙驛)에서 합류한 후, 김유를 대장으로 삼아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했던 이귀·최명길·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 등의 600~700여 명의 군사, 그리고 이천으로부터 온 이중로(李重老)의 군사 등과 함께 창의문으로 진군하여 성문을 격파했다.

 

이어 창덕궁에 이르자 반정군에 포섭되었던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내응으로 훈련도감의 군사가 반정군을 체포하지 않고 오히려 성문을 열어줌으로써 대궐을 쉽게 점령했다. 반정세력은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호를 회복시켜준 후 그 권위를 빌려 광해군과 동궁을 폐출하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을 왕위에 추대했다. 한편 광해군은 반정군이 대궐에 침입한 뒤 비로소 대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으로 숨었으나 곧 체포되어 서인으로 강등된 후 강화로 귀양보내졌다.

 

또한 폐모정청(廢母庭請) 등에 앞장섰던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은 물론 북인으로서 광해군 말기까지 정치에 관여했던 수십 명이 처형을 당하고, 200여 명이 유배당했다. 반면 반정에 참여한 인물들은 1623년(인조 1) 윤 10월 53명이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책봉되었다.

 

인조반정 후 정권을 장악한 서인은, 광해조 대북정권 몰락의 원인을 정책의 패륜성에서도 찾았지만, 보다 주요한 원인은 당시 정치세력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던 서인·남인 등 다른 붕당의 존재와 반대의견을 무시함으로써 야기된 불만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서인정권은 북인을 도태시키면서도, 남인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임명하는 등 명분상 하자가 없는 남인을 크게 등용함으로써 반대당의 존재와 비판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괄의 난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한 뒤 서인들은 반정공신인 공서파와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로 갈라졌다. 공신들 간의 알력이 심해지면서 1624년 1월 문회·허통·이우 등이 이괄과 그의 아들 전·한명련·정충신·기자헌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했다.

 

이괄은 아들 전이 모반의 사실여부를 가린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붙잡혀 가게 되자, 전을 압송하러 온 이들을 죽인 후 1만 2,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역시 모반혐의로 압송되고 있던 한명련을 구출한 뒤 서울로 진격, 황주·마탄·임진 등에서 관군을 잇달아 격파하고 서울을 점령했으며, 선조의 아들 흥안군 제를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다음날 뒤쫓아온 관군에게 파주 길마재에서 크게 패하여 광주·이천으로 후퇴하던 중 죽음을 당함으로써 반란은 실패했다.

 

임진왜란 때 붕당간의 본격적인 쟁권(爭權)은 가장 주전론적 입장에 섰던 북인들의 승리로 귀결되었지만, 이들은 다시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대북(大北)·소북(小北)으로 나뉘었다.

 

이후 광해군대에 정인홍(鄭仁弘)·이이첨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북정권은 왕권의 확립을 위해 서인·남인 등 다른 붕당의 의견을 무시하고, 소북계의 지지를 받은 영창대군을 살해하며,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는 등 무리한 조치를 취했다. 이에 서인계열의 사림세력들은 패륜행위를 명분으로 대북정권을 타도하고 정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1623년(광해군 15) 서인계의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 등과 함경북도병마절도사 이괄 등은 반정을 위해 사모군(私募軍)을 이끌고 홍제원(弘濟院)에 모였다.

 

그런데 총지휘자로 추대되었던 김유(金瑬)가 사전 계획 누설을 이유로 소극적으로 행동하자, 이괄은 이를 비난했다. 따라서 반정에 성공한 후에도 김유와의 관계가 불편했다. 인조 즉위 후 서인들은 반정공신인 공서파(功西派)와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淸西派)로 갈려졌고, 공신들의 사적군사력이 그대로 유지되자 '훈신군관'에 대한 비난이 높아졌다.

 

공서파들은 정권 안정을 위해 대북·소북 인사의 처형과 반역음모 적발에 힘을 기울였고, 자기파 중심의 논공행상을 함에 따라 비서인이자 무관인 이괄은 한성부판윤에 머물게 되었다. 이어 후금(後金)의 성장으로 인해 북방문제가 심각해지자 이괄은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휘하의 평안북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에 임명되어 영변으로 출진했다.

 

그런데 1624년 1월에 문회(文晦)·허통(許通)·이우(李佑) 등이 이괄과 그의 아들 전(旃)·한명련(韓明璉)·정충신(鄭忠信)·기자헌(奇自獻)·현집(玄楫)·이시언(李時言)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했다. 이에 기자헌·현집 등을 문초했으나, 역모에 대한 단서는 잡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공서파들은 이괄이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두렵게 생각하고 일단 아들 전을 서울로 압송하여 문초하려 했다. 이에 이괄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전을 압송하러 온 이들을 죽이고 역시 서울로 잡혀가는 한명련을 구해내어 "군측(君側)의 악을 숙청한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1월 22일 항왜병(降倭兵) 100여 명을 선봉으로 하여 1만 2,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향했다. 이괄군은 도원수군과의 충돌을 피하여 영변-자산(慈山)-상원(祥原)-평산(平山)-개성의 진격로를 택했다. 이괄군은 황주신교(黃州薪橋)에서 정충신과 남이흥(南以興)의 군대와 싸워 크게 이긴 후, 평산(平山)이 경비가 엄함을 알고 봉산 고읍(古邑)에서 전탄(箭灘)을 건너 샛길로 진군하여 마탄(馬灘:예성강 상류)에서 또 관군을 대파했다. 이괄군이 개성으로 진격함에 따라 인조는 공주로 피난갔고, 2월 11일 반군은 서울에 입성하여 경복궁 옛터에 주둔하여 선조의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왕으로 추대하고, 관원을 배치하여 새로운 행정체제를 세웠다.

 

한편 각처에 방을 붙여 도민(都民)의 마음을 안심시키며 생업에 충실할 것을 당부했다. 이때 도원수 장만의 군사와 각지 관군의 연합군은 길마재[鞍峴]에서 진을 치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반란군의 공격에 응전했다. 2월 11일 이괄군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길마재를 포위·공격했으나, 대패하고 밤에 수구문(水口門:지금의 광희문)을 나와 광주(廣州)로 향하다가 관군의 추격으로 완전히 흩어졌다.

 

이후 이괄·한명련이 2월 15일 이천(利川)에서 부하장수 기익헌과 이수백에게 죽음을 당함으로써 난은 실패했다. 이괄의 난은 대내적으로 수도의 함락, 국왕의 몽진(蒙塵) 등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와 공신세력 내부의 갈등의 노골화, 어영청 등 군영재편을 초래했으며, 대외적으로는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이 후금으로 도망가 남침(南侵)의 야욕을 자극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의 명분을 제공하기도 했다.

 

 

광해군과 인조반정

 

광해군(光海君, 1575~1641)

 

본명은 이혼으로 조선의 15대왕으로 선조의 아들이다. 조선왕조를 통틀어 조와 종과 같은 왕의 칭호를 받지 못한 2명(연산군, 광해군) 중 1명이다. 연산군은 왕의 역할을 못해 페위되었다면 광해군은 촉발된 사건으로 인해 폐위가 되 군(君)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광해군은 누구인가?

 

1. 임진왜란 중 세자에 책봉되다.

 

광해군은 1575년(선조 8)에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혼(琿)이다. 공빈 김씨는 임해군과 광해군 두 아들을 낳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임해군과 광해군은 자식이 없던 의인왕후의 손에서 자랐다. 조정에서는 일찍부터 세자를 세우는 일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선조는 적자가 없는 상황에서 세자를 옹립하는 일 자체를 꺼려했다.

 

그러나 뜻밖의 상황이 광해군을 세자로 만들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도성을 버리고 피란을 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분노로 들끓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대신들도 더 이상 세자 책봉을 미룰 수 없다며 왕을 압박했다. 끝까지 망설이던 선조는 결국 광해군을 세자로 삼기로 했다. 큰아들인 임해군을 두고 광해군을 세자로 세운 것은 임해군의 성질이 포악해 세자가 될 자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세자에 책봉된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분조를 이끌며 종묘와 사직을 지켰다. 그리고 들끓는 민심을 수습하고, 군국기무를 맡아 민·관군과 의병의 활동도 독려했다. 왕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한 것이다. 광해군은 1592년(선조 25) 6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분조를 이끌었다. 최홍원(崔興源), 이덕형(李德馨), 이항복(李恒福) 등이 광해군의 분조에서 활약했다. 광해군은 분조가 해체된 후에도 군무사(軍務司)의 업무를 주관하며 국란 극복에 앞장섰다.

 

2. 정통성 논란과 왕위 계승

 

전쟁은 끝났다. 이제 모두가 합심해 전란으로 상처 입은 국토와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야 할 때였다. 그러나 당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 중심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이미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고, 전란 중에는 왕을 대신해 분조까지 이끌었는데 새삼스럽게 왕위 계승 문제가 불거진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원인은 명나라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명나라에서 광해군이 적자도 아니고 장자도 아니라는 이유로 세자 책봉 재가를 미루고 있었다. 이는 당시 명나라의 정치적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이를 빌미로 조선을 조종하려던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선조도 마음이 돌아섰다. 전쟁 중에 광해군을 세자로 삼아 나라의 근본을 세우겠다던 선조의 태도 변화에 광해군은 당황했다.

 

1606년(선조 39), 선조의 바람대로 첫 번째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났다. 이는 곧 광해군의 시련으로 이어졌다. 선조는 아예 노골적으로 "명나라의 책봉도 받지 못했으면서 세자 행세를 하느냐."라며 광해군의 문안조차 받지 않으려 했다. 조정에서는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중심으로 영창대군을 세자로 옹립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이것은 광해군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었다. 광해군은 정통성 논란과 함께 서른 살이나 어린 동생과 왕권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조가 1608년(선조 41)에 갑자기 병이 깊어지면서 상황은 광해군에게 유리하게 급반전되었다. 죽음을 앞두고 선조가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한 것이다. 아무리 적자라도 겨우 두 살인 영창대군에게 보위를 물려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1608년(선조 41) 2월 1일 선조가 눈을 감자 광해군은 즉위식을 올리고 조선의 15대 왕으로 즉위했다.

 

3. 왕권과 패륜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명나라에 선조의 죽음과 자신의 즉위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차일피일 미루던 명나라는 광해군의 즉위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장자인 임해군이 있는데 어떻게 차자인 광해군이 왕위를 차지했냐는 것이었다. 이에 당황한 사신 이호민(李好閔)이 급히 변명했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세자 시절 내내 정통성 논란에 시달렸던 광해군에게는 슬픈 소식이었다. 게다가 명나라에서는 임해군을 직접 만나 내막을 알아보겠다며 조사단까지 파견했다. 임해군은 광해군의 동복형으로, 타고난 성품이 사납고 방자해 왕위 계승 경쟁에서 밀려난 인물이었다. 따라서 자신을 밀어내고 동생인 광해군이 왕이 된 데 불만이 많았다. 대북 일파는 임해군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광해군은 혈육을 죽일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러나 대북은 기어이 모반죄를 씌워 임해군을 강화로 귀양 보내고, 그와 관계된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다 죽였다. 그런 임해군을 명나라 조사단이 직접 만나겠다고 하니 광해군과 대북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임해군을 협박해 입단속을 하고 조사단에게 뇌물을 주는 것으로 사태를 무마했다.

 

광해군은 1609년(광해군 1) 3월에야 겨우 명나라로부터 책봉 조서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 5월 임해군은 유배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정확한 사인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으나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현감이 그를 살해했다고 알려져 있다. 임해군을 직접 죽인 것은 아니지만 이 일로 광해군은 왕권을 지키기 위해 혈육의 죽음을 방조한 패륜 군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임해군의 죽음 이후로도 진릉군, 능창군 등의 왕족이 연루된 대규모 옥사가 발생했다. 광해군과 대북은 이런 식으로 정적을 제거해 나갔다. 그러나 그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인물은 어린 이복동생 영창대군이었다. 광해군이 어렵게 명나라의 승인을 받았다고는 하나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이 살아 있는 한 정통성 논란은 언제고 다시 재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영창대군을 처단하라는 삼사와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이어서 폐모론까지 등장했다. 그 뒤에는 이이첨 등이 있었다. 이이첨의 무리는 이 일에 동조하지 않는 서인들에게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항복, 이덕형 등은 끝내 대북의 폐모론에 동조하지 않다가 죽었다. 결국 이것은 훗날 서인들이 반정을 일으키는 명분이 되었다.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된 데 이어 강화로 유배되었다. 당시 영창대군의 나이는 겨우 여덟 살이었다. 1614년(광해군 6) 영창대군은 아궁이에 불을 지펴 펄펄 끓는 밀실에 갇혀 질식해 죽고 말았다.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부사가 저지른 일이었다. 임해군에 이어 영창대군까지 살해되면서 광해군은 패륜의 멍에를 쓰게 되었다.

 

한편 어린 자식을 잃고 슬픔에 빠진 인목대비는 경운궁에 홀로 남겨진 채 사실상 연금 상태로 지냈다. 그런 와중에 경운궁(慶運宮)에서 임금을 비방하는 내용의 익명서가 발견됨으로써 인목대비 폐비에 관한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618년(광해군 10) 1월, 인목대비는 폐비되어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 대북은 폐비에 반대한 인사들을 모두 조정에서 쫓아내는 등 계속해서 전횡을 저질렀다. 광해군은 왕권에 대한 집착으로 이들의 전횡을 묵과했다. 스스로 반정의 불씨를 키운 것이다.

 

4. 광해군의 업적

 

왕권을 지키기 위해 패륜을 저지른 군주라는 것이 광해군의 본질은 아니다. 그는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을 다시 재건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가시적인 성과도 이룩했다. 광해군의 재위 기간 중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외교 정책이다.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실리주의적 등거리 외교를 펼쳤다. 사대교린의 외교 정책을 고수했던 이전까지의 왕들과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일면이었다.

 

광해군이 왕위에 있던 17세기 초는 중국 대륙에서 명조와 청조가 교체되던 시기였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이후 국력이 더욱 쇠퇴해 멸망의 길로 가고 있었다. 반면 후금은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가 청나라를 세우고 점점 세력을 넓혀 갔다. 그리고 마침내 1618년(광해군 10) 청은 명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작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낸 것에 대한 보은으로 조선에 파병을 요구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출병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조선에 중립을 요구하는 후금과의 관계를 고려한 것이었다. 광해군은 섣불리 명의 요구를 들어주었다가 후금이 조선을 침범할 것을 우려했다. 물론 이것은 명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던 대부분 대신들의 생각과는 달랐다. 광해군은 명분보다는 실리를 선택했다.

 

광해군이 이룩한 업적 중 또 하나는 바로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이다. 대동법은 백성들이 부담하는 공물을 실물 대신 미곡으로 통일해 납부하도록 한 근대적 개념의 세제이다. 이전까지의 공납은 지역별로 배정된 품목을 직접 바치는 것으로 백성들의 부담이 컸다. 또한 그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은 특산품이 공물로 배정되는 경우도 있어서 방납(防納)의 폐단이 있었다. 이러한 방납의 폐단을 줄이고자 임진왜란 때는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이 시행되었다. 이 대공수미법을 보완하고 확대한 것이 대동법이었다.

 

5. 광해군 반정으로 무너지다.

 

1623년(광해군 15) 3월, 이서(李曙), 이귀(李貴), 김류(金瑬) 등을 주축으로 한 서인 반정군이 창덕궁에 들이닥쳤다. 반정의 낌새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던 광해군은 그제야 궁성을 넘어 도망쳤지만 곧 잡히고 말았다. 이렇게 광해군과 대북 정권은 끝이 났다.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능양군(綾陽君)을 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16대 왕 인조다.

 

광해군은 문성군부인 유씨 그리고 폐세자 부부와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그해 7월, 폐세자 질은 땅굴을 파서 위리안치된 집에서 도망치려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이어 세자빈 박씨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문성군부인 유씨는 1624년(인조 2)에 병으로 죽었으며, 광해군은 19년의 유배 생활 끝에 1641년(인조 19)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능리에 있다.

 

광해군이 폐출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반정 세력은 살제폐모(殺弟廢母)의 패륜과 명나라에 대한 불충을 반정의 이유로 내세웠다. 하지만 이것은 겉으로 내세운 명분일 뿐, 좀 더 본질적인 원인은 대북 정권의 독주로 인한 서인 세력의 반발이었다. 왕권을 지키려는 욕심에 대북의 전횡을 묵과한 것이 광해군의 패착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어떤 면에서 시대를 앞서간 왕이었다. 반정으로 그 의미가 퇴색되긴 했지만 국란을 극복하고 국가의 안정을 유지하려고 했던 광해군의 노력은 그 자체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생명의 신비

 

잘 알려지지 않은 정자와 난자 이야기

 

여성이 일생 동안 배란하는 난자는 700만 개 안에서 선택된다. 배란, 거기에는 숨막히는 드라마가 있다! 배란된 난자는 8시간이면 노화되어 버린다. 정자는 각각 다른 설계도를 갖고 있다. 정자의 사명은 DNA를 난자로 운반하는 것 정자를 만드는 주머니인 음낭이 외부에 붙어 있는 이유는? 정자는 여러 가지 장애를 극복하면서 난자를 향해 나아간다.

 

난자를 순회하는 정자는 2~3 억 개 중 100개뿐 정자의 경주(race)는 남성을 만드는 Y염색체가 단연 유리하다. 정자의 수가 많은 것은 자연도태 때문만도 아니다. 단 하나의 정자가 들어가는 순간 문이 닫힌다. 정자는 무엇 때문에 고생하여 난자에 도착하는 것일까? 섹스를 즐기는 것이 가장 확실한 수정법이다.

 

수정된 기쁨을 몸 전체로 나타내는 '생명의 댄스' 세포분열, 드디어 생명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착상 때에는 자궁 안의 가장 편한 장소를 선택한다. 그래도 착상에 실패할 적이 있다. 인공 수정란은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 수정란은 착상하기 전에 탈피하는가? 외 모체는 수정란의 착상을 받아들이는 것일까?

 

 

알게 되면 놀란다! 생명 탄생까지의 신비

 

각각의 세포는 이미 신체의 어떤 기관이 될 것인지 정해져 있다. 세포가 여러 가지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은 단백질 덕택이다. 가장 먼저 신경이 생성된다. 태아의 심음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격심하다. 태아는 1주일 사이에 어류에서 포유류로 진화를 수행한다. 물갈퀴 세포가 없어지고 다섯 손가락이 만들어진다. 대뇌도 생물진화 단계를 따라 발달한다. 왜 임

 

신 초기에 유산하기 쉬운가? 태반의 불가사의한 구조를 알고 있는가? 태반에는 여러 가지 우수한 기능이 있다. 유전적으로는 남자인데도 남자로 태어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내성기가 생기고 계속해서 외성기가 생겨난다. 태아의 뇌는 3개월경부터 성 차이가 나타난다. 임신 중의 요통이 출산에 도움을 준다는 것은 사실인가? 임신을 하면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누구나 다 구토증이 올까? 왜 입덧을 영어로는 시크니스(morning sickness)라고 하는가? 왜 입덧이 생기는 걸까? 모성애는 호르몬의 도움으로 싹트게 된다.

 

남자아이를 임신하면 엄마의 얼굴 모습이 강인해진다. 임부에게 있어서 풍진이란 무서운 병이다. 알코올, 니코틴은 태반에서 걸러 낼 수 없다. 임신 중 수영은 왜 좋은 것일까? 급격한 온도 차이나 명암의 변화에도 태아는 깜짝 놀란다.

 

뱃속에서 아기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태아는 뱃속에서 무엇을 보고 있을까? 태아도 낮과 밤의 차이를 느낀다. 태아도 생물시계를 갖고 있다. 태아는 뱃속에서 어떤 소리를 들을까? 태아는 정확하게 엄마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태아는 비발디나 모차르트를 제일 좋아한다 기분이 상쾌한 음은 태아의 뇌를 부쩍부쩍 발달시킨다 양수, 그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물이다. 양수는 점점 변화하고 있다. 태아는 왜 거의 전량의 양수를 하루에 다 마시고 싶어할까? 태아는 이미 젖을 먹는 연습을 하고 있다.

 

손빠는 일은 뇌의 발달에 따라 고도화되어 간다. 태아는 뛰어오르기도 재주넘기도 할 수 있다. 태아의 혈액은 모든 뼈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태아가 호흡운동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인간의 뇌세포는 태어나기 전에 대량사하는가? 태아에게도 숙면과 얕은 잠의 리듬이 있을까? 산소를 많이 받은 태아 쪽이 영리하다.

세계 연극사 중세 연극

 

▶ 1. 중세 초기 유럽 연극

 

1. 중세 초기는 교회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연극을 금지시켰다. 10~15세기 이후부터 포교의 수단으로 종교극 이 성행하였다.

중세 초기 극장형태 교회 내 무대 -> 교회 밖 계단 무대 -> 이동식 마차 무대(릴레이식 순환 무대)

 

 

2. 르네상스 이탈리아 연극

15세기 르네상스 운동의 충격으로 이탈리아 중심으로 종교극이 쇠퇴하기 시작하였고,고전극을 바탕으로 한 희곡을 쓰기 시작하였다.

 

3. "꼬메디아 델 아르떼"

16세기 중엽 베니스와 롬바디 근교에서 발생한 이탈리아 연극의 한 형태. 작가는 작품의 뼈대와 줄거리만을 제공하고 배우가 임의로 대화를 창조하여 즉흥적으로 연기하는 배우 중심 의 연극. 가면을 착용하고 주제는 남녀간의 사랑을 다루었다.

 

"꼬메디아 델 아르떼"의 대표적인 인물

1) 일렉키노(하인 zanni)

2) 브리겔라(하인 zanni)

3) 판타롱(귀족)

4) 닥터(학자)

 

4. 엘리자베스 시대(16세기 중반~17세기 초)영국 연극

문화가 꽃피었던 시기였고 국력을 과시한 시대였다. 그들은 폭발할 듯한 욕망의 출구로서 연극을 택했다.영국의 역사를 무대에 재현시켜 반성을 하고 인간의 위 대함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욕이 왕성하였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작가

셰익스피어, 크리스토퍼 마알로우, 벤존슨, 토마스 키드, 존블리 등.

 

5.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장과 극장의 특징

행복(fortune), 지구(globe), 백조(swan), 장미(rose)극장 등.

 

1) 반 실내극장

2) 무대는 3층으로 창문까지 딸린 건물(고정무대)

3) 무대 뒤 양쪽 문으로 배우들 등.퇴장

4) SET는 없었다.

5) 창문까지 연기장소로 활용

6) 3층으로 된 객석,지붕이 있었다.

 

6.윌리엄 셰익스피어

영국의 극작가.그는 당시 전통적인 사회사상을 객관적인 태도로 종합적으로 표현하였고,장면 변화는 다양하 며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구사하여 등장인물의 성격이 개성이 있고,매혹적이다.그의 작품은 양식 규모에서 다양 하고,대중들을 위하여 쓰여졌다.

 

비극 : <햄릿>, <오델로>, <맥베드>, <리어왕>(4대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

희극 : <한 여름밤의 꿈>, <말괄량이 길들이기>, <십이야>, <실수연발>

희비극 : <베니스의 상인>

 

7. 스페인 황금시대의 스페인 연극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말까지의 스페인 문학의 전성기로서 "로뻬 데 베가"의 등장으로 다수의 천재적인 극작가들이 배출되고,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과 비교될 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스페인 황금시대의 극장 : 여관 또는 주택의 앞마당

코랄(corral : 건물 사이의 공터

 

8. 17세기 후반~18세기 초 프랑스 연극

종교,정치를 손아귀에 쥐고 있던 리쉴뢰 대승정은 연극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엄격하고 교육적이고 철저 한 규교ㄱ에 맞지 않는 연극은 금지 시켰다. 이 당시의 연극을 신고전주의 연극이라 한다.

 

9. 프랑스 신고전주의 시대의 대표적 극작가

 

1) 코르네이유 : 프랑스의 극작가. <르시드>, <오라스>, <폴리웍트>

2) 라신느 : 프랑스의 극작가. <라테바이드>, <알렉산더>, <페드르>

3) 몰리에르 : 프랑스의 희극작가, 연기자, 극단 대표. 그는 많은 작품을 임기응변식으로 쓰고 연출하였다. 관객심리 파악에 출중하며 성격(풍자)희극으로 비극에 상응하는 경지로 격을 높였다.

<경솔한 인가>, <사랑의 원한>, <돈쥬앙>, <수전노>, <귀족수업>등

"코메디 프랑세스 : "(국립극단) 몰리에르 사후 그의 극단명으로서 최초의 프랑스 국립극장.

세계 연극사

 

고대 연극

 

1. 본격적인 연극을 시작한 민족과 시기 : 기원전 7~8세기, 그리스 민족

 

2. 그리스 연극과 디오니소스 신과의 관계

그리스인들에게 숭배를 받은 디오니소스 신의 축전이 기원전 7~8세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축제에 신화와 전설을 소재로 춤과 음악을 곁들인 연극을 공연

Ex) 티람보스(dithyramb)-디오니소스 찬가(코러스의 노래)

 

3. 그리스 연극의 특징

 

1) 범국가적,범국민적인 행사

2) 국가가 지원,온 국민들이 참여

3) 엄격하게 배우 선발

4) 가면을 사용한 배우 1인 2~3역

5) 합창단(코러스)의 노래와 춤 연극에 도입

6) 삼일치법 철저히 지킴

 

4. 그리스 시대의 극장

 

1) 오케스트라(orchestra)-둥근 공연 장소

2) 스케네(skene)-탈의실,대기실

3) 파로도스(parodos)-배우들의 등,퇴장 통로

4) 테아트론(theatron)-관객석

 

5. 코러스의 기능

 

1) 극 내용을 설명

2) 극중 행동 비판

3) 배우와 관객의 교량적인 역할

 

 

6. 삼일치법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주장한 연극의 법칙 하루(24시간)이내의 시간에 한 장소에서 하나의 사건(행동)으로 극이 이루어져야 한다.

 

 

7. 그리스 시대의 연기 양식

 

1) 가면 착용

2) 목에서 무릎까지 내려오는 의상(키톤-chiton)

3) 과장된 머리수건,굽이 높은 신

4) 과장된 동작과 목소리

 

8. 세계 최초의 연기자 : 데스피스

 

9.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1) 에스킬러스 <아가멤논 대왕>

2)소포클레스 <오이디프스 왕>, <안티고네>

3) 유리피데스 <메디아>

 

10. 그리스 시대의 희극 작가

 

1) 아리스토 파네스 <말벌>, <새>, <개구리>

2) 메난다 <쌍둥이 이야기>

 

11. 로마 시대의 대표적 비극 작가 : 세네카

그의 작품은 잔혹연극,복수극이라 불려진다. <트로이의 연인들>, <피드라>

레제 드라마(lese-drama) : 읽기 위한 희곡

 

12. 로마 시대의 희극 작가

1) 플루터스 <메나크미>

2) 테렌스 <안드리아>

■ 블랙커피 효능

 

▶ 블랙커피(Black Coffee)

 

보편적으론 에스프레소에 조금더 물을 타고 아무런 첨가물을 넣지 않으면 블랙커피라고 부른다. 본래는 화이트 커피(크림 또는 우유를 넣은 커피)의 반대 개념으로, 크림을 넣지 않은 커피를 말한다. 줄여서 '블랙'이라고도 널리 부른다. 그러다가 현재는 의미가 확장되어 설탕을 넣지 않아도 블랙커피라고 한다. 아무것도 넣지 않았으니 맛은 굉장히 쓰다.

 

그래도 설탕 섭취를 기피하는 풍조로 인해서 인기가 그럭저럭 있긴 하다. 여담으로 로스팅 방식에따라 블랙커피의 폭이 넓어짐(커피색과 맛, 향이 두더러지게 변화한다.)으로 여러 블랙커피를 마셔본후 평가하는걸 추천한다. 당뇨를 치료하고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하루 한 잔 정도면 혈당수치를 정상으로 만드는 데 큰 도움을 준다고, 다만 카페인에 민감한 사람은 섭취량에 신경 써야 한다.

 

블랙커피를 과다하게 많이 섭취할 경우 카페인의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블랙커피를 마시면 어른이다라는 클리셰로 종종 많은 매체에서 등장한다. 유럽에 여행갔을 때 한국식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화이트 커피"라고 말하면서 주문해야 한다. 만약 그냥 "커피"를 주문하면 소주잔에 담긴, 농도가 엄청 진한 이게 나온다.

 

 

▶ 블랙커피 효능 6가지

 

1. 두뇌

하버드 공중보건대학 연구팀에 따르면 매일 8온스(약 227㎖) 컵으로 4잔의 커피를 마시는 여성은 우울증 발병 위험이 20%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커피에 들어있는 카페인 성분은 세로토닌이나 도파민 같은 뇌 화학물질에 영향을 준다. 또한 8온스 커피 컵 2잔에는 약 200㎎의 카페인이 들어있는데 이 정도 양은 장기 기억력을 향상시킨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2. 심장

매일 200~300㎎의 카페인을 섭취하면 휴식을 취할 때 혈류량이 향상돼 심장이 기능을 더 잘 수행하도록 만든다.

 

3. 간

하루에 2잔 정도의 커피를 마시면 간경변증과 같은 간 질환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4. 당뇨병

28개의 연구결과를 조사한 하버드대 연구팀에 따르면 커피를 마시면 2형 당뇨병 발병 위험을 33% 낮출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 발

매일 커피를 마시는 남성의 경우 통풍 위험을 59% 낮출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커피는 혈액속의 요산 수치를 낮추는 효능이 있다.

 

6. 피부

2012년에 나온 연구결과에 따르면, 매일 3잔 이상의 커피를 섭취하는 여성은 기저 세포암에 걸린 위험이 크게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 40대에 하지 않으면 안될 50가지

 

▶대한민국 40대란?

 

인간은 40이 되면서 모든 것을 깨닫거나 바뀌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사회와 경제를 비중적으로 책임져야하기도 한다. 四十代. 40세부터 49세까지의 나이를 이르는 말이다. 이 나이대에 들어서 '불혹(不惑)' 이라고도 한다. 사실상 이 때부터 중년기의 시작이다.

 

2017년 기준으로 1967년생~1977년생 해당. 이 나이대 들어서 남녀 모두 중년기에 접어드는 연령대이자 초등ᆞ중고등학생 자식들을 먹여살리고 학교 등록금을 통해서 자금을 소비하는 연령대이기도 하다. 이 연령대에 들어서 점차 노화기도 심해지고 갱년기 등의 병이 오는 경우도 일부 있어서 건강에 위협을 받기도 하는 기기이다.

 

또한 자기 나이에 책임을 지고 독립된 집안의 가장으로 대접받기에 권위를 세우는 대신 그 대가도 큰 편이다. 20대나 30대가 아직 뭔가 미성숙한 티를 조금 보여줘도 큰 잘못이 아니면 적당히 넘어가는 반면 이들은 그런 거 없다. 자기가 실수했으면 사소한 거라도 바로 태클이 들어오고 그 대가를 칼같이 치러야 한다. 서점가에 이들 40대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서적들이 출간되어서 공감을 얻어가고 있다.

 

이 연령대 극초반이 신입사원이 될 수 있는 마지노선이며 그 이후에는 경력직에만 입사할 수 있다. 경찰 및 소방공무원 채용 연령제한이 만 40세이다. 다만 정치적으로는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연령이 만 40세 이다. 이 연령대부터 남성의 경우 군복무 의무가 완전히 소멸되며, 여성의 경우 학부모군과 주부군에 속하기도 한다.

 

현역 군인으로 복무할 경우 장교의 경우 중령 또는 대령으로 군대의 실질적인 운영을 담당하며 부사관의 경우 상사로 주로 행정보급관을 하게 된다. 최근 들어서는 평균 수명 및 첫 취직, 초혼 연령대도 늘어남에 따라 40대 초반도 젊은 나이로 보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듯한 추세이다. 몇십 년이 지나면 40대가 당연하다는 듯 젊은 나이 취급을받게 될지도 모른다.

 

 

▶ 40대에 하지 않으면 안될 50가지

 

01. 제2의 성인식을 올려라.

02. 10대에 했던 일을 다시 시작하라.

03. 지금부터 행동체력을 단련하라.

04. 평소에 열심히 운동하라.

05. 정신력이 필요한 분야에 도전하라.

06. 10대처럼 상쾌하게 웃어라.

07. 추억을 떠올리며 웃어라.

08. 진정한 어른의 웃음을 웃어라.

09. 밝은 메세제로 메시지를 남겨라.

10. 작은 실수에도 즉시 사과하라.

 

11. 부하직원에게도 번저 인사하라.

12. 멋있게 인사하는 사람을 따라하라.

13. 반복연습을 통해서 성장하라.

14. 쓸모없는 일에 도전하라.

15.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반복하라.

16. 많이 고민하고 많이 반문하라.

17. 성공 느낌에 휩싸이지 마라.

18. 자유시간을 많이 만들어라.

19. 새로운 것에 온 몸을 내던져라.

20. 순수하게 기쁨을 느끼는 일을 하라.

 

21. 사람들이 반대하는 전직을 하라.

22.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라.

23. 골인 지점이 없는 경쟁을 하라.

24. 라이프 워크를 가져라.

25. 승패보다 미의식에 집착하라.

26.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즐겨라.

27. 자신의 정열을 모두 불태워라.

28. 연봉을 줄이기 위해서 고민하라.

29. 적당한 시기에 일부러 실패하라.

30. 대역이 없는 일을 하라.

 

31. 일을 부하직원에게 넘겨줘라.

32. 인생의 스승을 발견하라.

33.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만나라.

34. 새로운 일에 도전하라.

35. 어린시절에 모았던 작품을 다시 보라.

36. 스스로 영웅이 되라.

37. 스스로 책임을 떠맡아라.

38. 몸과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라.

39. 치밀하게 계산하지 마라.

40. 자기 스스로 유령이 되라.

 

41. 결벽주의에서 벗어나라.

42. 남의 행복을 위해 일하라.

43. 나중에 시작하는 사람을 응원하라.

44. 효도를 함으로써 행복해져라.

45. 능력을 과시하지마라.

46. ‘막무가내 돌격형’에서 졸업하라.

47. 인생의 키워드를 만나라.

48. 실패확률이 높은 일에 도전하라.

49. 자신을 향해 활을 쏘아라.

50. 항상 영혼을 의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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