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최장수 재위 군주 엘리자베스 여왕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Alex andra Mary, 1924년 4월 21일 생)

 

영국 윈저 왕가의 네 번째 왕위 계승자로 1952년 즉위 이래 65년 째 재임하고 있는 영국 역사상 최장수 재위 군주입니다. 1952년 2월 6일에 서거한 부왕 조지 6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1947년 덴마크의 왕족인 에든버러 공작(Duke of Edinburgh) 필립 마운트배튼(Philip Mountbatten)과 결혼해 찰스 필립 아서 조지(Charles Philip Arthur George), 앤 엘리자베스 앨리스 루이즈(Anne Elizabeth Alice Louise), 앤드루 앨버트 크리스찬 에드워드(Andrew Albert Christian Edward), 에드워드 앤서니 리처드 루이스(Edward Antony Richard Louis) 등 3남 1녀를 낳았다.

 

 

사파이어 주빌리와 플래티넘 주빌리

 

* 사파이어 주빌리 : 영국 왕실 즉위 65주년 기념식입니다. 그녀의 고조모인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기간인 63년을 넘어 '영국 최장수 군주'로 기록을 세웠다.

* 플리티넘 주빌리 : 영국 왕실 즉위 70주년 기념식입니다. 그녀가 5년 뒤 플래티넘 주빌리를 맞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며, 건강관리를 잘해 세계인의 축복을 받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 비하면 조족지혈입니다. 고구려 장수왕(394~491, 99세 사망)의 즉위기간은 80년(412~491)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또 다른 잘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고구려 태조왕입니다. 국조왕 또는 태조대왕이라고 하는 고구려 제6대 국왕입니다. 무려 119(47~165)세에 사망한 역대 최장수왕 아마도 기네스북 기록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재위기간도 93년으로 최장수 즉위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 예상치 못한 왕위 계승

 

그녀의 큰아버지(백부)였던 에드워드 8세가 자식을 남기지 못한 채 사망하자 차남이었던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인 조지 6세가 왕위 계승을 하였다. 조지 6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그녀의 삼촌인 에드워드 8세가 이혼한 미국 여성과의 사랑 때문에 왕위 계승을 포기하면서 그녀가 차기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이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25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 노블레스 오빌리주를 실천한 윈저 소위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동생인 마거릿 로즈(Margaret Rose)와 함께 버크셔(Berkshire)의 윈저성(Windsor Castle)으로 대피하였고, 1945년 그녀의 나이 20세에는 전쟁에 직접 참가해 조국에 봉사하고 싶다며 국왕에게 힘들게 허락을 받았다. 그해 3월 4일 여성보조지방의용군(Women's Auxiliary Territorial Service)에 입대해 구호품 전달 등의 업무를 맡기도 했다. 이후 전쟁이 커지자 기존 업무외에 전투 업무로 확대되었고 엘리자베스 윈저 소위는 군용 트럭을 모는 운전사로 노블레스 오빌리주를 실천한 공주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실천의 의미는 무엇인가?

 

▶ 평탄치 않았던 엘리자베스 여왕 결혼

 

엘리자베스 여왕의 남편인 필립 왕자는 몰락한 그리스 왕가의 성을 버리고 외가의 성인 마운트배턴을 쓰게 되어 그의 공식이름도 필립 마운트배턴이 되었다. 필립은 그리스 왕족으로 덴마크 왕실의 일원인 올덴브르크 왕가의 혈통이었다. 필립은 스코틀랜드 고든스 타운 학교와 다트머스의 왕립 해군사관학교에서 수학한 뒤 전쟁이 터지자 왕실 해군에 들어가 중위 계급장을 달고 장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 와중에 그는 구호품 수송 분야에서 활동하던 엘리자베스 소위의 초대를 받아 윈저 성에서 그녀와 자주 만날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엘리자베스와 필립은 먼 친척 관계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부담 없이 만나면서 조국의 안위, 애국의 길, 그리고 해군장교의 역할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였다. 그리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자주 만났고, 드디어 연인 관계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둘의 결혼은 논쟁의 대상이었다. 필립은 영국의 국교인 영국 성공회의 신자가 아닌 정교회 신자였고 뒷바침해줄 후원세력도 없었다. 둘의 관계를 알고 있던 조지 6세는 엘리자베스가 21세 생일을 맞기 전에 그들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1947년 7월, 약혼이 선포되고 11월 20일에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거행된 그들의 결혼식이 전세계로 전해지면서 안정적인 영국 왕실의 미래가 보장되었다. 슬하에 총 3남 1녀를 두었다.

 

 

▶ 왕위 계승

 

조지 6세의 건강이 나빠지자 엘리자베스 2세는 아버지를 대신해 왕실 행사를 주관하고, 외교 활동을 담당했다. 1952년 엘리자베스 2세는 케냐를 거쳐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2월 6일 조지 6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케냐에서 곧바로 귀국해 왕위를 이었다. 그리고 1953년 6월 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 엘리자베스 여왕의 재산

 

사실 그녀의 재산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약 3억 2천만 파운드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돈으로 환산하면 5천억원에도 미치지 못한다. 사실 이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하튼 세계 군주들 가운데 12위에 해당하며 환산한 재산 대부분은 부동산, 미술품, 보석 등이다.

 

그러나 공개되지 않은 부동산, 미술품, 보석 등이 더 많고 왕실 이름의 재산과 수입은 그 몇배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정확하게 산정하면 수십조원에 달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 존경받는 엘리스베스 여왕

여왕으로 즉위한 뒤에 엘리자베스 2세는 영연방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인도, 남아프리카 등지를 방문하면서 외교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또한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독립 등으로 대영제국이 해체되면서 약화되어가던 영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드러내지 않으며 입헌군주로서 신중하게 행동했으며, 활발한 자선과 후원 활동으로 국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려는 모습을 보였다. 때문에 엘리자베스 2세는 국민들에게 높은 신뢰와 인기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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