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독(Underdog) 뜻과 의미

 

언더독(Underdog) 뜻?

 

주로 스포츠와 정치에서 자주 회자되는 단어로, 고유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Underdog의 사전적인 의미에서 볼 수 있듯, 투견등에서 아래에 깔린 개를 의미한다. 즉 싸움에서 지고 있는 개에서 유래하였지만, 이후에는 정치, 스포츠, 마케팅 분야 등에서 사용되고 있다.

 

언더독 효과란?

 

어려운 환경에 처해져 있거나, 경쟁 또는 시합에서 지고 있는 사람이 이기를 바라는 현상을 말한다. 우리 정서에도 지고 있는 약자를 응원하는 마음을 뜻한다. 몇가지의 예로 언더독 효과를 알아보겠습니다.

 

가. 정치에서 언더독 효과란?

 

최근 코로나 19 사태이후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주로 '편승효과' 자주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언더독 효과는 드물게 사용된다고 볼수있다. 지지도가 낮은 정당에서 '저를 좀 봐주세요'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여당의 힘이 너무 강해질 때 견제할 수 있는 약하거나 힘이 없는 정당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동정표' 의미일 수 있다.

 

나. 스포츠에서 언더독 효과란?

 

 

메이저리그에서 오클랜드 에셀렉티 빌리빈 단장의 '머니볼'에서 볼 수 있듯이 전혀 이길 것 같지 않는 팀이 즉 확률적으로 승리하거나 우승하는 팀이나 선수를 의미한다. 즉 스포츠계에서는 '(무명의) 반란 또는 기적'의 의미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례는 스토리를 묶은 다수의 영화가 있다.

 

다. 마케팅 광고에서 언더독 효과란?

 

브랜드 마케팅과 홍보에서 널리 볼 수 있다. '처음 시작이 미약하거나, 초라한 시작', '희망과 꿈', 역경을 이겨내는 '도전정신'을 강조한다. 

 

라. 우리나라에서 언더독 효과

 

우리민족의 정서상 잘 매칭이 되는 효과이다. 어려운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한 자수성가형 인물, 동계스포츠에서 힘든 무관심과 역경을 이겨내고 세계정상에 우뚝순 컬링 등과 같은 사례에서 우리 국민들이 열광하는 것도 언더독 효과로 볼 수 있다.

2020년 세계 부자 순위, 재산, 갑부 순위

2020년 4월 6일 현재 포브스 발표 기준입니다.

 

2020년 포브스 발표 현재기준 세계 부자 순위, 재산 순위, 갑부순위 TOP20입니다. ​

세계 부자 순위, 재산 순위, 갑부순위 TOP 10입니다.

 

세계 부자순위, 재산 순위, 갑부 순위 TOP10

세계 부자순위, 재산순위, 갑부순위 1위는 아마존의 창업자인 Jeff Bezos입니다.

재산이 무려 $131 Billon입니다.​

TOP2는 마이크로 소프트 창업자인 빌게이츠 오하마의 현인 워렌 버핏,

루이비퉁의 Bernard Arnault& Family

멕시코의 SKTelecom Carlos Slim Hetu& Family Zara의 오르테가의 순입니다.

TOP6 중 현재, 1위, 2위, 5위, 6위까지는 한 때 1위를 한 번씩은 해본 세계 부자들입니다.

포브스의 발표기준이 측정할 수 있는 재산이다보니 주식의 변동에 따라 바뀌기도 합니다. ​

그 뒤로 오라클 창업자 Larry Ellison, Facebook 창업자 마크 주커버그 최근 대선 시도했다 실패한 전 뉴욕시장 블럼버그 마직막 TOP10은 우리가 너무 잘아는 구글의 래리 페이지입니다.

 

세계 부자순위, 재산 순위, 갑부 순위 TOP10

언제나 9~10위, 11~12위를 왔다갔다하는 주식을 5:5로 소유한 사이좋은 형제 Koch 형제

아시아 최대 부호 Ambani가 TOP13위, 구글은 TOP20중 두명을 배출하였습니다. 레이페이지와 또다른 한명 Sergey Brin

TOP15위는 세계 여자 부자 순위 1위, 로레알의 Francoise Bettencourt Meyers & Family, 로레알 화장품으로 유명하죠.

TOP16~18위는 월마트 가문입니다. TOP19위는 현 마이크로소프트 CEO Ballmer, TOP20은 Tencent's의 Ma Huateng ​ 

 

아마도 금번 코로나 사태가 점점 진행되면서 주식의 가치가 변화면서 상당폭의 세계 부자 순위, 갑부순위가 변동이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아마존의 제프 베소스의 경우 재산이 더 상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Parents' Day

 

어버이날을 짧게 표현하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짧게는 표현이 불가능하겠죠.^^


우리의 어버이날

 

어버이의 은혜에 감사하고, 어른과 노인을 공경하는 경로효친의 전통적 미덕을 기리는 날.

어른 봉양과 경로사상을 확산하고 국민정신계발의 계기로 삼아

우리 실정에 맞는 복지사회건설에 기여하도록 하는 범국민적 기념일이다.

 

1956년부터 5월 8일을 '어머니의 날'로 지정하여 행사를 진행하던 중

'아버지의 날'이 거론되어

1973년 '어버이날'로 변경 지정하였다.


어버이날 유래와 의미


어버이날 유래

 

어버이날의 유래는 미국의 남북전쟁 시기인 18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많았습니다.

특히 어머니들에게는 자식과 남편을 잃거나 부상을 많이 입었겠죠.

미국의 앤 자비스라는 여성이

실의에 빠진 어머니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

'어머니들의 우정의 날'을 만든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그녀가 사망하자 그의 딸인 애나가

어머니가 만든 '어머니들의 우정의 날'을 기리기 위해

1905년 5월 9일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의 한 교회에서

'어머니를 기억하는 모임'을 만들었으며,

이 모임이 전국 각지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30년이 지난 후

1934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이

'어머니 날'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하였습니다.


현재 전 세계 169개국에서 이 날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국가(84개국)에서

5월 둘째 주 일요일을 '어머니날'로 기념하고 있으며

세계 여성의 날인 3월 8일을

'어머니날'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시사상식 패스트 트랙(Fast Track)이란?

 

최근 시사에 자주 등장하는 시사상식 용어 중 하나인 패스트 트랙(Fast Track)이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정치권용어로 자주 언급되지만,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국제 영역까지 다양하게 쓰이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경제분야, 국제분야, 정치분야로 나누어서 그 의미를 기술합니다.

 

경제분야에서의 패스트 트랙(Fast Track)이란?

 

경제분야에서는 일시적으로 자금난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은행의 유동성 지원 프로그램을 말한다. 언제나 발생하는 일인된 지금까지 자주 듣지 못해 약간 의아하기 까지 합니다. 힘든 중소기업에게 너무나 좋은 제도입니다.

 

일반적인 절차는 기업이 은행에 패스트 트랙을 신청하면 은행은 은행은 기업의 재무 및 경영 상태를 심사하여 A∼D 등급을 판정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신용평가 기준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보편적인 A~D 등급까지 기준을 먼저 서술합니다.

 

 


▷ A등급(최우수)은 정상적 영업이 가능하다고 판단될 때(정상)

▷ B등급은 자금이 부족하거나 혹은 기타 사유로 피해를 입어 자금 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일시적 유동성 부족) ▷ C등급은 부실 징후가 분명하다고 판단될 때(부실 징후 기업)

▷ D등급은 기업 정상화 가능성이 전무하다고 판단될 때(법정관리) 내려진다.


 

판정에 따라 A, B등급을 받은 기업은 유동성 지원을 받게 되며, C등급은 워크아웃에 돌입한다.

반면 기업 정상화 가능성이 전무하다고 판단되는 D등급은 지원 대상에서 제외한다.

 

국제분야에서의 패스트 트랙(Fast Track)이란?

 

미국 대통령이 국제통상협상을 신속하게 체결할 수 있도록 의회로부터 부여받는 일종의 협상특권을 말합니다. 무역촉진권한(TPA·Trade Promotion Authority)으로도 불리기도 합니다.

패스트 트랙(Fast Track) 절차를 보면, 의회가 대통령에게 신속협상권(Fast Track) 권한을 부여한 경우, 미국 의회는 행정부의 협상 결과를 일정기한(90일) 내에 수정 없이 찬반결정만을 하게 된다.

따라서 신속협상권(Fast Track)를 부여받은 대통령은 국제무역 협상 과정에서 강력한 신뢰성 및 리더십을 기반으로, 무역 또는 기타 협상을 주도할 수 있다. 

 

정치분야에서의 패스트 트랙(Fast Track)이란?

 

앞서 알아본 것 처럼 패스트 트랙은 신속한 처리가 필요한 경우 발동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어떤 현안이 있을 때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을 우선하는 것입니다.

 

국회에서 중요성과 긴급성이 있는 특별한 안건을 신속하게 처리하도록 한 법적 절차. 사안이 긴급하고 중요한데도 국회에서 통과가 지연될 경우, 법안이 신속하게 처리될 수 있도록 <국회법>에서 상임위원회와 본회의의 처리 절차를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경우 과반 의석을 차지한 다수당의 독자적인 법안 처리가 쉽게 가능할 수 있으므로 법안 통과의 요건이 일반적인 의결보다 높게 규정되어 있다.

 

우리나라 <국회법>에서도  패스트 트랙으로 지정하려면, 국회 재적의원의 2분의 1 이상이나 소관 상임위원회의 2분의 1이상의 찬성으로 지정을 요청하고, 재적의원의 5분의 3이나 상임위원회의 5분의 3이상의 찬성으로 지정된다. 패스트 트랙 안건으로 지정이 되면, 지정된 법안 심의 과정에서 유보되지 않고 자동 처리되어 본회의에 상정된다.

 

때에 따라서는 긴급발동 된 패스트 트랙으로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는 좋은 면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는 양면을 가지고 있는 제도라 할 수 있습니다.

 

 

2019년 세계 부자/재산 순위

 

2019년 5월 6일 현재 포브스 발표기준 세계 부자/재산순위 TOP10입니다.

작년 이맘 때와 비교했을 때 아마존의 창립자인 Jeff Bezos과 1위 등극을 하였고 루이비통으로 잘알려진 브랜드를 운영중인 Benard Arnult&Family가 새롭게 등장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항상 9, 10위를 차지하고 있던 Koch 형제가 11, 12위가 된 것 같습니다.

 

세계 부자/재산 순위 TOP10

앞으로 순위가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나 상위권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는 주식가치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포브스 발표기준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주식 평가액이기 때문입니다.

 

TOP10 인물 중 한 번 정도는 1위에 오른 경험이 있는 분은 2위에 Bill Gates, 5위에 Carlos Slim Helu, 6위에 Amancio Ortega 정도로 기억됩니다. 

 

LPGA 여자 골프 세계랭킹 순위

 

2019년 5월 5일 현재 LPGA 여자 골프 세계행킹 순위입니다.

자료 출처는 lpga.com 입니다.

 

현재 LPGA 여자골프 세계랭킹 순위  TOP10엔 4명, TOP20까지 확대해보면 8명이 대한민국 낭자입니다.

세계여자골프 TOP20에 40%가 대한민국 선수입니다.

가히 압도적인 비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김세영 프로를 좋아해서 21위까지 게재하였습니다.

 

한 때 세계 최강이었던 박인비 프로가 16위까지 떨어져 있는 것이 아쉽습니다.

역시 프로 스포츠에서 영원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곧 1위로 만나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2019 대한민국 여자 부자/재산 순위

 

2019년 대한민국에서 여성의 힘을 느낄 수 있는

대한민국 여자 부자/재산 순위 TOP5

우선 결론부터 아래 이미지로 확인하세요.

 

2019년 대한민국 여자 부자/재산 순위 TOP5

아마도 TOP3에 있는 순위는

누구나 짐작하고 알 수 있는 순위입니다.

삼성가에서 대한민국 여자 부자/재산 순위는 독식입니다.

 

그리고 # 표시는 대한민국 전체 부자/재산 순위입니다.

대한민국에서 TOP5 부자/재산 순위라면

30위 권 이내라는 의미 이기도 합니다.

 

TOP4(대한민국 25위)

Chey Ki-won is the younger sister of SK Group Chairman Chey Tae-Won

굳이 번역을 하지면 최태원 회장님 Sister입니다.

 

TOP5(대한민국 30위)

치토스와 오리온 쵸코파이로 유명한

오리온이네요.

 

 

 

2019 대한민국 부자/재산 순위 TOP10

 

오랫만에 대한민국 부자/재산 순위를 게재합니다.

늘 보던 분도 있고, 갑자기 등장하신 분도 있습니다.

대한민국 부자/재산 순위는 언제나 그자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부자/재산 순위 TOP1~5

대한민국 부자/재산 순위 TOP1~5

1~5위 순위표에 낳설은 분 서정진 회장님입니다.

생물의약 회사로 알려진 셀트리온 CEO입니다.

언제나 보던 회사와 인물이 아닌데 등장한 것으로 보면

갑작스런 대박이 있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물론 제가 이 회사에 대해 잘 몰라 더 이상 설명은 하지 않습니다.

제 소견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이렇게 새롭게 등장하는 회사와 인물이 있다는 것은

그래도 아직 대한민국이 역동적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대한민국 부자/재산 순위 TOP6~10

대한민국 부자/재산 순위 TOP6~10

6위~10위 순위를 보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분이 많습니다.

이 중 9위와 10위에 랭크된

방정혁(넷마블, 게임회사), 임성기(한미약품 창업자)

두 분 회장님입니다.

 

대한민국 부자/재산 순위 TOP10은

전통적인 의미의 회사(그룹)와 게임, 약품 회사가 잘 어우러진 모양입니다.

다음번엔 세계부자 순위를 연재하겠습니다.

■ [역사상식] 흥선대원군과 척화비


▶ 흥선대원군(이하응(李昰應, 1820~1898)) 집권 


조선 제 26대왕 고종의 아버지로 외국 문물에 반대하는 쇄국정책을 실시한 정치가. 본관은 전주, 자는 시백, 호는 석파, 해동거사이며 1863년 12월 철종이 죽자 둘째 아들 명복(고종의 아명)이 조대비에 의해 왕위에 오르면서 흥선 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아들 고종의 즉위로 조선역사상 유일하게 왕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었으면서 살아 있는 왕의 아버지로 대원군에 봉해지고,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는 섭정을 맡게되었다.  


10년간의 집권을 통해 왕권 강화를 꾀하면서 체제의 내적 개혁으로 봉건제 해체의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그의 개혁 정치는 일시적으로 내부적 모순을 완화시키고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았다. 이후 조선 사회는 급격히 해체되었고 외세의 침략도 심화됨으로써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왕권강화와 체제정비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대외정책으로는 쇄국정책을 하였다. 그에 두드러진 대외정책에 대해 알아보자. 물론 이 쇄국정책에 대해서 호불호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1866년 8월 천주교도 박해를 구실로 쳐들어온 프랑스 군대를 격파한 병인양요를 겪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대원군은 외국인에 대해 더욱 적개심을 가졌다. 그러한 가운데 1868년 4월 E. 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德山)에 침입하여 군아(郡衙)를 습격하고, 이어 가동에 있던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사건이 일어났다(남연군 분묘 도굴사건). 


이로써 대원군의 외국인 배척사상은 굳어지게 되었다. 1871년 4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미국 함대가 쳐들어와 덕진진(德津鎭)과 광성보(廣城堡)를 점령하자, 서울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결사항전을 준비했다. 조선정부가 외교교섭에 응하지 않고 전투가 장기화되자 미국 함대는 그해 5월 철수했다. 


일본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후 근대적 조약 체결을 요구했으나 대원군은 왜양일체(倭洋一體)라는 입장에서 이를 거절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이 일단 저지되었으나, 이후 더욱 강화된 쇄국정책으로 인해 조선은 세계사에 자주적으로 합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 흥선대원군의 하야와 재기 기도 


흥선대원군은 외척세도를 봉쇄하기 위해 보잘 것 없는 가문 출신인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고종의 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민비는 척족을 규합하고 대원군 반대세력을 결집하여 대원군 축출을 추진했다. 이에 1873년 최익현(崔益鉉)이 대원군의 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한 상소를 계기로 11월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자 대원군은 정계에서 물러나 양주에 은거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계 복귀를 꾀했다. 1880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가져온 〈조선책략 朝鮮策略〉의 반포를 계기로 이듬해 전국 유생들의 척사상소운동(斥邪上疏運動)이 전개되었는데, 그때 승지 안기영(安驥永) 등이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 재선(載先)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사전에 누설되어 처형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에 흥선대원군이 관련되었으나, 국왕의 아버지라 하여 불문에 붙여졌다.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고종에게 사태수습을 위한 전권을 위임받자, 이 기회에 정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즉 대원군은 궁궐에서 도망쳐나간 민비가 죽었다고 공포한 후 무위영(武衛營)·장어영(壯禦營)·별기군(別技軍)을 폐지하고 5군영을 복설했으며,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삼군부를 복설하는 등 반개화정책을 폈다. 그러나 곧 흥선대원군은 민씨정권의 요청을 받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청나라 톈진[天津]으로 납치되었고, 이어 바오딩부[保定府]로 옮겨져 유폐생활을 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이런 행동들은 아들 고종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1895년 고종은 대원군의 정치활동을 대부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해 그의 바깥 활동을 막았다. 사실상 유폐나 다름없는 생활 속에서도 흥선대원군은 정계복귀를 꿈꾸었으며 만년의 그의 헛된 꿈은 며느리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을미사변)과 관련해 일본 공사 미우라에게 이용당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을미사변 이후 대원군은 또다시 잠시 정권을 잡지만 신변에 위험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하여 친러파가 대두하면서 축출되었다.


3년 후인 1898년 흥선대원군은 7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1907년(광무 11) 대원왕(大院王)에 추봉(追封)되었다. 19세기 후반 격변하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조선의 정치사를 관통했던 흥선대원군은 그의 정치적 공과를 떠나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것에는 틀림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10년간의 집권기를 통해 왕권강화를 꾀하면서 체제의 내적 개혁으로 봉건제 해체의 위기를 극복하려 했으며,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해서는 위정척사적 입장에서 국력을 모아 강력하게 대응했다. 그의 개혁정치는 일시적으로 내부적 모순을 완화시키고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모두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았다. 


 이후 조선사회는 더욱 급격히 해체되었고 외세의 침략도 더욱 심화됨으로써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하게 되었다. 1907년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 [역사 상식] 신미양요(辛未洋擾)


최근 TV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의 역사적 배경이 되고 있는 신미양요에 대해 알아봅시다.


▶ 신미양요(辛未洋擾)


- 1871년(고종 8)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號)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무력 침략한 사건으로 조선과 미국 간의 전쟁이다. 1866년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미국은 조선에 대해 무력에 의한 강제통상을 계획했다. 


1871년 4월 덕진진과 광성보를 점령한 미국 함대는 조선에 심한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교섭에 응할 것으로 기대했던 것과 달리, 대원군의 결사항전을 본 미국은 결국 함대를 이끌고 청으로 돌아갔다. 이후 조선의 쇄국정책과 배외의식은 더욱 견고해졌다.  




▶ 신미양요의 배경


- 신미양요의 배경 : 조선과 미국은 1855(철종 6), 1865(고종 2), 1866년에 미국 배가 각각 조선의 동해안 통천, 영일연해, 선천군에 표류함으로써 3차례의 접촉이 있었는데, 이때마다 조선은 미국의 배를 청나라로 호송하는 등 친절을 베풀었다. 


그러나 1866년 7월 평양경내의 대동강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운 사건이 일어났다. 


아시아팽창주의정책을 추진한 미국은 1866년 8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두 차례 탐문항행을 실시하면서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응징과 조선과의 통상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1871년 조선을 침략하였다.


▶ 신미양요 전투 경과 


미군이 경고에도 불구하고 광성진으로 접근해오자 조선군은 경고용 포격을 가하였고 이에 미군은 일단 물러났다. 그러나 미군은 조선군의 경고용 사격을 빌미로 삼아 오히려 조선정부에 사과와 손해배상을 요구하였다. 


조선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미군은 6월 10일 군함 2척을 앞세우고 육상 전투대원 644명을 강화도의 초지진에 상륙시켜 무력으로 점령하고, 이어 덕진진 ·광성진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그러나 6월 11일의 광성진전투에서 미군 역시 피해가 많아 이튿날 물치도로 철수하였다. 


미군은 이곳에서 조선정부를 상대로 위협적인 외교적 수단으로 조선을 개항시키려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강경한 통상수교거부정책과 조선 민중의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신미양요 결과


이 격전에서 조선측은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魚在淳) 등 53명이 전사하고, 강화부 별무사 유예준(劉禮俊) 등 24명의 군인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을 내었다. 광성보를 빼앗기고 중군 어재윤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관민들은 긴장하고 두려워했으나, 대원군은 지구책(持久策)을 강구하면 프랑스 함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국 함대로 퇴각할 것이라 생각해 양이(洋夷) 매국지율(賣國之律)로 다스리겠다는 내용의 교서를 발표했고, 전국 중요도회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이러한 조선측의 반응은 패전한 조선정부가 당연히 교섭에 응할 것으로 예기하던 미국측에게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미국측은 다시 교섭을 요구했으나, 조선정부가 응하지 않자 대규모 군사행동을 감행하지 않고는 목적을 달성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로와 로저스는 당시 대규모의 침략전쟁을 감행할 수 있는 병력을 보유하지 못했고, 또한 대규모 군사행동은 본국으로부터 받은 훈령 외의 일이었으므로 결국 조선으로부터 철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그해 5월 15일 조선측에 공문을 보내 외교교섭의 책임을 갖고 있는 특파대원의 접견을 거절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논하고 장차 미국 국민이 조선 내에서 조난되었을 경우에는 구조·보호해달라고 요청한 후, 다음날 전함대를 거느리고 청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의 관민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의기충천했고 배외의식이 더욱 강화되었다. 신미양요 이후 조선인의 쇄국 및 배외의 태도는 더욱 견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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