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버트 라이시, 경제관련 10가지 거짓말

 

이따금 자신과 생각이나 이념이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일도 도움이 됩니다. 로버트 라이시(Rober B. Reich)는 진보적 정치경제학자입니다. 그는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고 현재는 버클리의 공공정책대학원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진보진영의 인사들 가운데는 활발하게 대중서를 펴내고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는 최근작 (로버트 라이시의 1대 99를 넘어 : 부의 불평등을 바로잡는 11가지 액션플랜)이란 작은 책을 펴냈습니다. 진보진영에 있는 인사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일까에 관심을 가진 분들을 위해 라이시 교수가 생각하는 ‘경제관련 10대 거짓말’을 옮겨 보았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엔 대부분은 참 말인데 이 분은 대부분은 거짓말로 보고 있습니다. 관점이 크게 다른 경우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진보진영에 계신 분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로버트 라이시가 생각하는 경제관련 10대 거짓말

 

첫 번째, 부유층이 고용을 창출한다. 그러므로 부유층에 부과하는 세금을 인상하면 경제가 멍이 들고 일자리 창출 속도가 늦어지는 반면에, 그 세금을 감면하면 국민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간다. 거짓말이다. (...) 부유층은 고용을 창출하지 않는다. 일자리를 막대한 대다수의 미국인이 구매력을 구비하고, 기업의 생산이 활발해져 근로자를 더욱 많이 고용할 때 생겨난다. 국민 대다수가 충분한 수입을 거두어 구매력을 갖추지 못하면 일자리는 창출되지 않는다. 국가소득이 부유층에게 집중되는 경우에는 중산층이 구매력을 잃으므로 일자리는 생겨나지 않는다.

 

두 번째, 세금을 낮춰주면 기업은 고용을 더욱 많이 창출하고 경제 성장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이 또한 거짓말이다. (...) 기업이 추가로 생산 시설을 확충하거나 새로운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데 투자하지 않는 까닭은 세금과 아무 관련이 없다. 시설을 확충해 제품을 생산하더라도 이를 구매할 만큼 주머니에 돈이 있는 고객이 없기 때문이다. 2011년 가뜩이나 시원치 않은 경제 성장의 거의 2/3는 재고를 정리한 기업이 이끌었다. 소비가 늘어나지 않으면 기업은 돈을 더 투자하지 않으므로 재고 교체에 의존해서는 경제가 활발하게 돌아갈 수 없다.

 

세 번째, 정부 규모를 줄이면 일자리가 더욱 많이 생겨나고 경제도 개선될 것이다. 이 말도 틀렸다. 정부 규모를 축소하면 주와 지방 단위에서 교사, 소방관, 경찰관, 사회복지사가 줄고, 연방 단위에서는 안전진단가와 군인을 포함하여 정부 근로자가 줄어든다. 또한 정부 하청업자도 줄어서 민간 부문 근로자의 고용도 감소한다.

 

네 번째, 규제를 줄이면 경제가 더욱 견실해질 것이다. 이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이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 일반 국민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비용을 초과하는 경우에는 규제가 필요하고, 혜택을 최소화하고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규제를 설계해야 한다.

 

다섯 번째, 지금 당장 재정 적자를 줄이면 경제가 개선될 것이다. 이 또한 헛소리이다. 많은 미국인이 여전히 일자리를 잃고 있는 상황에서 최우선 순위는 고용 창출과 경제 성장에 두어야 한다. 정부 지출에서 발생하는 적자는 민간 지출의 적자와 다르다. 고용과 성장이 정상 수준으로 회복하기 전에 예산을 삭감하면 실업이 증가하고 조세 수입이 줄어든다. 경제가 정상 궤도로 돌아오고, 실업률이 5% 언저리까지 떨어지고,경제 성장률이 3% 선으로 올라섰을 때 비로소 연방 예산을 줄여나가야 한다.

 

여섯 번째,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를 축소해야 한다. 두 프로그램의 운영비가 매우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원인은, 의료비가 대체로 매우 신속하게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 의료비를 줄이는 훨씬 좋은 방법은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가 제약회사와 병원에 행사할 수 있는 협상력을 사용하여 가격을 더욱 낮추고, 진료 행위별 수가제에서 건강한 결과별 수가제로 전환하는 것이다. 또한 메디케어는 민간 건강보험사보다 관리비가 훨씬 적으므로 국민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일곱 번째, 미국의 사회안전망은 지나치게 너그럽다. (...) 미국의 사회안전망은 지나치게 작은 동시에 구멍투성이다.

 

여덟 번째, 사회보장기금은 폰지사기이다, 이 말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 사회보장제도가 지닌 장기적 문제에 관해 논리적 해결책을 찾아보자면, 연금액을 줄이거나 수급연령을 높이기보다 사회 보장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 소득의 최고 한계치를 높여야 한다.

 

아홉 번째, 중하위 소득층이 납부하는 연방 소득세의 비율이 고소득층보다 낮고, 소득세를 전혀 내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은 불공정하다. 전혀 그렇지 않다. 고소득자에게 적용되는 세율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높은 것이 오히려 공정하다.

 

열 번 째, 일률과세가 더욱 공정한다. 절대 그렇지 않다. 일률 과세는 빈곤층보다 부유층에 확실히 유리하다.

■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10계명

 

1.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갑자기 더 행복해지거나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더 평화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도 당신이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당신만의 여행이다.

 

2. 사랑 없이 여행하지 말라.

 

삶의 이 여행을 하는 동안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당신의 임무는 사랑을 찾는 일이 아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스스로 만들어 놓은 사랑의 방해물을 찾아내는 일이다.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은 사랑에서, 삶에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다.

 

3. 관계는 자신을 보는 문

 

사람과의 관계에서 때로 텅 빈 공간이 되라. 다른 사람이 지나다니게 하라. 자신 안에서 세계의 영혼을 발견하고, 인간 안에서 신의 정신을 보라. 그것이 진정한 관계이다. 삶은 거울과 같다. 삶에 미소지으라. 그러면 삶이 당신에게 미소 지을 테니까.

 

 

4. 상실과 이별의 수업

 

당신이 아름다운 정원에 앉아 있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고통속에 있다면, 만일 당신이 상실을 경험한다면, 그리고 만일 당신이 머리를 모래에 묻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아주 특별한 목적으로 당신에게 주려는 선물로 여긴다면 당신은 성장할 것이다.

 

5. 아직 죽지 않은 사람으로 살지 말라.

 

죽음에 도달하는 순간 모두 제로가 된다. 삶의 끝에서 아무도 당신에게 당신이 얼마나 많은 학위를 가졌으며, 얼마나 큰 집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좋는 고급차를 굴리고 있는지 묻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6. 가슴 뛰는 삶을 위하여

 

당신은 삶을 위하여 얼마나 시간을 할애하는가? 하루에 몇 시간씩 일하고, 얼마를 벌고, 어떤 야망을 이루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그 모든 일을 한다 하더라도, 삶은 언제까지나 저쪽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당신의 인생 시계는 몇 시인가?

 

7. 영원과 하루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은 '삶을 그렇게 심각하게 살 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별의 순례자이며, 단 한 번의 즐거운 놀이를 위해 이곳에 왔다. 우리의 눈이 찬란하지 않다면, 어떻게 이 아름다운 세계를 반영할 수 있는가?

 

8. 무엇을 위해 배우는가?

 

그 어떤 것이라도 단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신이 무화과 하나를 원한다고 나에게 말하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 역시 시간이 필요하다고. 먼저 꽃을 피우도록 기다리라고. 열매를 맺고, 그것이 마침내 익을 때까지 시간을 주라고.

 

9. 용서와 치유의 시간

 

용서의 첫 단계는 상대방을 다시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들은 실수투성이고, 부서지기 쉽고, 외롭고, 궁핍하고, 정서적으로 불완전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우리 자신과 똑같다. 그들 역시 오르막길과 내리막길로 가득한 인생 길을 걷고 있는 영혼들이다.

 

10. 살고 사랑하고 웃으라.

 

상실은 무엇이 소중한지 보여 주며, 사랑은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가르쳐 준다. 관계는 자신을 일깨워 주고 성장의 기회를 가져다준다. 두려움, 분노, 죄책감조차도 훌륭한 교사이다. 삶의 가장 어두운 시간에도 우리는 성장하고 있다. 삶은 그 특별한 매력을 나타내기 위해 굴곡이 있는 것이다.

■ ‘실행의 힘’에서 배우는 독서경영

 

“좋아요. 긍정적인 상태의 의사결정자와 이야기하라. 감정적 상황을 만들어라. 그들이 제품을 믿고 이미 구매를 결정했다고 가정하라. 그리고 나중에 또 구매하기 위해 다시 찾을 거라고 가정하라. 이 말씀이시죠?” 오스카는 멘토가 말한 내용을 다른 표현으로 바꿔 확인하듯 말했다. 바로 그거야.“ 로이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 <판매의 비법을 배우다> 중에서

 

멘토가 결론을 내렸다. “너는 할 수 있다. 너는 하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조개를 열어 보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말이야.” “알겠어요. 부정적인 생각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계속해서 용기를 내서 밀고 나가는 것이군요. 아저씨가 오래전에 주셨던 카드에 나왔던 말처럼 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네요. ‘세일즈 방문이나 구매 권유를 계속해 나가야 하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그러고 싶을 때와 그러고 싶지 않을 때,’” - <판매의 비법을 배우다> 중에서 

 

오스카가 말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목표를 정하고 달성하도록 도울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오스카, 이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란다. 우리는 저마다 나름대로 목표와 바람이 있지. 너와 나에게는 중요한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게 있다면 그것은 누구든 자기가 이끄는 사람들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최선의 기회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거야. 그리고 훌륭한 리더가 되려면 관리를 뛰어넘어, 말 그대로 사람들을 이끌고 지도해야 한단다. 솔선해서 모범을 보이고, 그 방법이나 원리를 설명하여라.

 

 

그들에게 꿈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렇게 하면 동기부여가 되고, 결국 그들은 모든 걸 해내고 싶어 할 거다. 또 직원들에게 자신의 목표를 종이에 적도록 해라. 그러면 목표를 보다 현실적으로 느끼고 매번 상기시킬 수 있단다.” 로이는 잠시 말을 멈추고 커피 한 모금을 마신 다음, 오스카에게 다른 카드 한 장을 건넸다. “꿈을 날짜와 함께 적어 놓으면 그것은 목표가 되고, 목표를 세분화 하면 그것은 계획이 되며,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면 꿈은 실현되는 것이다.” - <매니저와 리더는 분명 다르다> 중에서

 

“여유로운 생활이 즐거워지면 우리는 스스로 목표를 정한 후 더욱더 여유로운 삶을 즐기고 싶어 한단다. 원하는 목표를 정하고 성취하려고 노력하게 되지. 승진해야겠다. 창업을 해야겠다. 차를 바꿔야겠다 등등. 때로는 물질과 상관없는 목표를 정하기도 하지. 체중을 줄이겠다든지 담배를 끊겠다는 식으로 말이야. 이게 바로 목표를 세우고 성취하는 단계란다. 목표를 세우면, 예를 들어 ‘새 차를 마련하기’라고 해보자. 그러면 돈을 모으고 열심히 일하는 등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 그리고 마침내 자동차 매매계약서에 사인을 하게 되면 정말 기분이 날아갈 듯하지.” - <인생의 목표를 찾아서> 중에서

■ '내가 고전을 공부하는 이유’에서 배우는 독서경영

 

고전을 읽는다면 그 고전이 삶에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이론으로만 아는 것은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나치게 철학적인 내용을 내 사고력이 따라가지 못한다면 열심히 읽어봤자 정말 ‘옛사람의 찌꺼기’가 될 수 있다. 고전은 현재 내가 하는 일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하고 앞으로 내가 살아가면서 겪을 갖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영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고전을 읽고 공부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 <나만의 지혜를 찾아내는 법> 중에서

 

아무리 곧은 나무일지라도 한 번 굽혀지면 다시 펼 수 없고, 나라 간에 전쟁을 일으킬 만큼 귀한 보물도 다듬지 않으면 산 속의 돌에 불과하다. 즉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나쁜 환경이나 습관에 물들어 잘못되면 제대로 재능을 발휘하기는 힘들다는 말이다. 이 말의 결론으로 안자는 ‘습속이성(習俗移性)’, 즉 ‘습속이 사람의 본성을 바꾼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습속이란 한 사회에서 이어 내려온 고유한 관습이나 풍속, 즉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 <천성을 이기는 습관의 힘> 중에서

 

 

노자는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지혜롭고 지식이 많은 사람은 오히려 말이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에 하루 종일 떠들고 다닌다. 빈 수레가 요란한 것이다. 인격적으로 완성된 사람은 자신을 과시하지 않아도 그 인격이 저절로 언행에서 풍겨 나온다. “말이 곧 그 사람이다”라는 말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 <제대로 말하라> 중에서

 

우리가 지식을 습득하고 공부를 하는 것은 머릿속에 입력하는 일이다. 이 지식이 꽃을 피우려면 삶에서 이것들이 출력되어야 한다. 지식은 머릿속에 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표현이 되어야 완전히 내 것이 된다. 놀라운 발견은 일에 몰두할 때 떠오를 때가 많았다. 전문용어로 ‘세렌디피티’라고 하는 것이다.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창조성을 ‘모든 인간의 본성에 내재하는 기본적 특성’이라고 했다. 위대한 사람들은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위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많이 생각하고 노력했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다. 통찰력도 마찬가지다.

- <표면 아래 감추어진 것을 읽어라> 중에서

 

우리 시대에 마흔 살은 중년의 시작이면서 급격한 변화를 겪는 시점이다. 직장에서도 그렇고 가정에서도 그렇다. 직장에서는 장기근속이냐, 퇴직이냐를 결정하는 시점이다. 부장의 자리에 올라 임원을 바라보면서 승승장구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만년 대리, 혹은 과장으로 조기퇴직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 가정에서도 아내와는 갱년기 때문에 서먹한 사이가 되기도 하고 사춘기에 들어서는 아이들 때문에 걱정이 떠나지 않는 사람도 있다. 흔들림 없이 자신을 세워야 할 나이에 오히려 급격한 변화 속에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럴 때 공자와 맹자가 말한 것처럼 미혹(迷惑)되지 않는다거나 부동심(不動心)을 갖는다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마흔이라는 나이를 용기를 갖고 맞아야 한다.

- <미혹되지도, 흔들리지도 마라> 중에서

 

전쟁을 통해 지는 자는 물론이고 이기는 자도 엄청난 피해를 입기 때문에 가능하면 싸우지 않고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옛날의 전쟁도 마찬가지지만 오늘날에도 경쟁은 불가피한 것이 사실이다. 인류의 발전도 다양한 경쟁을 통해 힘을 길러왔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만약 치열한 경쟁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오늘날과 같이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분석한다.

- <잘하는 것에 집중하라> 중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결정이 연속이다.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삶도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그 삶이 달라진다. 결정의 순간에 어떻게 대처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면 누구나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요한 결정을 앞에서 누구나 망설이게 마련이다. 그래서 《예기》에서는 “큰일에 임해서 결단하는 것이 용기다”라고 말한다. 위기에 닥치면 자신을 믿는 믿음, 신속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결단력, 그리고 한 번 결정을 내리면 결코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갈 수 있는 추진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자신과 조직이 살고 더 큰 일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 <큰일 앞에서 절대로 망설이지 마라> 중에서

 

 

■ 리비도와 나르시시즘이란?

 

▶ 리비도(Libido)

 

기본적으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성적 욕구로, 프로이트가 제시한 개념 리비도는 정신분석학 용어로 성본능(性本能), 성충동(性衝動)을 뜻한다. 이 말은 보통 말하는 성욕, 다시 말해 성기(性器)와 성기의 접합을 바라는 욕망과는 다른 넓은 개념으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갖추고 있는 본능에너지를 뜻한다. 원래는 라틴어로 욕망을 뜻하는 단어이다. 성적인 욕구가 내부로 향하느냐 외부의 객체에게로 향하느냐에 따라 자아 리비도와 대상 리비도로 나눌 수 있는데, 어떤 경우이든 욕망이 만족을 향해 움직일 때 동원되는 에너지 전체를 지칭한다.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인간이 두 가지 기본적 욕구를 지니고 있다고 하였는데, 하나는 공격욕구인 타나토스이고, 또 하나는 성욕구인 리비도다. 성적 본능의 에너지를 리비도(libido)라고 가정하고, 리비도가 사춘기에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서서히 발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성본능은 구강기 · 항문기를 통해 발달하다가 5세경 절정에 이른 후, 억압을 받아 잠재기에 이르고, 사춘기에 다시 성욕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인간의 자아에 의해 성욕구가 통제받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리비도는 억눌린다고 볼 수 있다. 리비도는 긍정적이다 부정적이다로 구분할 수 없다. 한편 상황에 따라 도덕성과 리비도가 대립하게 되는데 이때 자아가 이를 조절하고 억제, 억압 등의 방어기제를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 나르시시즘(Narcissism)

 

자기애(自己愛)를 뜻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다 결국 물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Narcissos)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자기 자신에게 애착을 느끼는 현상이다. 정신분석학적 용어로 독일의 정신과 의사 P. 네케가 만들었다. 나르시시즘이란 말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반해 물에 빠져 죽은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나르키소스에서 딴 것이다. 한국어로는 자기애(自己愛)라 번역한다.

 

나르시시즘이란 용어가 알려지게 된 것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1914년 발표한 〈나르시시즘 서론(Zur Einführung des Narzißmus)〉을 통해서다. 그는 나르시시즘을 리비도가 자기 자신에게 향해진 상태, 즉 자기 자신이 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는 상태로 규정했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을 인격장애의 하나로 판단했으며 정신분석학적 개념으로 확립했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을 일차적 나르시시즘과 이차적 나르시시즘으로 분류했다. 일차적 나르시시즘은 나와 남을 구별하지 못하는 유아기에 리비도(욕망)가 자기 자신에게만 쏠려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차적 나르시시즘은 유아기가 지나면서 리비도의 대상이 나 아닌 남에게로 향하지만, 어떤 문제에 부딪혀 남을 사랑할 수 없게 되어 다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상태로 돌아오는 상태를 일컫는다. 나르시시즘은 자기 자신을 욕망한다는 점에서 자기중심주의와는 차이가 있다. 현대에 들어서 나르시시즘은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나르시시즘을 건강한 나르시시즘과 병적 나르시시즘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이때 건강한 나르시시즘은 문제가 없지만, 병적 나르시시즘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 기시감과 데자뷔 뜻

 

기시감(旣視感, 프랑스어: Déjà Vu 데자뷔) 은 처음 보는 대상이나, 처음 겪는 일을 마치 이전에 보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상한 느낌이나 환상을 말한다.

 

▶ 데자뷔

 

데자뷔는 프랑스어로 "이미 본” 이란 뜻으로 최초의 경험인데도 불구하고, 과거에 이와 같은 경험을 경험한 것 같은 착각을 일컫는 말이다. 인간의 뇌는 일상생활에서 엄청난 양의 기억을 저장하는데, 이 엄청난 양의 기억을 저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인간의 뇌는 일상생활에서의 기억을 간략하게 저장하는데, 간략하게 저장된 엄청난 양의 정보는 비슷한 기억이더라도 인간의 뇌는 같은 기억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생긴다는 견해가 있다.

 

보통 데자뷔 현상을 겪은 사람들은 대부분 꿈속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데 이것을 데자뷔 현상이라고 한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심리학자인 플로랑스 아르노(Florance Arnaud)가 최초로 이러한 현상을 규정하고, 이후 에밀 부아라크(Emile Boirac, 1851∼1917)이 데자뷰란 단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또한 그는, 데자뷔 현상은 과거의 망각한 경험이나 무의식에서 비롯한 기억의 재현이 아닌, 그 자체로서 이상하다고 느끼는 뇌의 신경화학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또 다른 학설은 무의식에 의한 행동이나 망각된 기억이 뇌에 저장되어 있다가 그것이 유사한 경험을 만났을 때, 되살아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사람의 뇌는 엄청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서 스치듯이 한번 본 것도 잊어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뇌세포 속에 저장하는데, 이런 세포 속의 정보들을 모두 꺼내는 것은 아니고 자주 보고 접하는 것들만 꺼내보지만, 뇌는 훨씬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무의식중에 했던 일을 다시 하거나 방문했던 곳에 갔을 때, 처음 하는 일 같은데 아련히 똑같은 일을 한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 미필적 고의와 무고죄

 

▶ 미필적 고의란?

 

고의의 지적 · 의지적 요소가 가장 위축된 형태의 약한 고의로서, 행위자가 객관적 구성요건의 실현가능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또한 그것을 감수하는 의사를 표명한 경우를 말한다. 예컨대, 인화물질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이 나도 좋다고 생각하고 담배를 피우다가 화재가 발생한 경우이다.

 

이러한 미필적 고의는 가장 불확정적인 고의의 형태이므로 과실, 특히 인식 있는 과실과의 구별이 모호하다. 그러나 고의와 과실은 형벌의 경중에서도 커다란 차이가 있으므로 그 구별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이 제시되고 있다.

 

판례는 행위자가 결과발생의 가능성을 인식하면서도 이를 용인(容認)한 경우는 미필적 고의이고, 용인하지 않은 경우는 인식 있는 과실이 된다고 한다. 즉 미필적 고의가 성립하려면 결과발생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인화물질 근처에서의 흡연은 위험하다는 인식)이 있음은 물론, 나아가 결과발생을 용인하는 내심의 의사(화재가 발생하여도 어쩔 수 없다는 범의)가 있음을 요한다(대판 1987.2.10, 86도2338).

 

▶ 미필적 고의 사례

 

예컨대, 보험금을 탈 목적으로 밤에 자기의 집에 방화(放火)할 때에 혹시 옆집까지 연소(延燒)하여 잠자던 사람이 타죽을지도 모른다고 예견하면서도, 타죽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방화한 경우와 같다. 미필적 고의는 불확정적 고의의 하나이다. 앞의 예에서 보험금 사취(詐取)를 위한 방화에 대해서는 확정적 고의가 있으나, 그로 인한 옆집 사람의 연소사(延燒死)의 결과에 대해서는 미필적 고의가 있게 된다. 미필적 고의는 고의와 과실의 중간영역에 위치하는 인식 있는 과실과의 구별이 어렵다.

 

앞의 예에서, 방화로 인하여 옆집에 연소함으로써 잠자던 사람이 타죽을지도 모른다고 예견한 점에서는 미필적 고의와 인식 있는 과실이 공통하지만, 다만 타죽어도 할 수 없다고 인용한 심리상태는 미필적 고의가 되고, 아직 초저녁이어서 깊이 잠들지 않아 곧 깨어나서 타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고히 믿는 심리상태는 인식 있는 과실이 된다고 이론상 일단 이렇게 구별되지만 실제상 그 입증은 어렵다. 미필적 고의가 있는 경우, 앞의 예에서는 살인죄의 책임을 지게 되고, 인식 있는 과실이 있는 경우에는 과실치사(過失致死)가 되어 형이 가벼워진다.

 

 

▶ 무고죄란?

 

타인으로 하여금 형사처분 또는 징계처분을 받게 할 목적으로 공무소 또는 공무원에 대하여 허위의 사실을 신고한 범죄이다(형법 제156조). ‘타인’이란 자기 이외의 자를 말한다. 따라서 자기 자신이 처벌받을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신고하였을 때는 본죄는 성립하지 않는다. 타인은 반드시 현존함을 요한다. 사자 또는 가공인물과 같은 실존하지 않는 자에 대하여 허위신고를 하였을 경우에는 단순히 「경범죄 처벌법」 제3조3항2호에 의하여 처벌됨에 불과하다.

 

그러나 타인에는 법인 또는 법인격 없는 단체 등도 포함된다. 또 피무고자인 타인은 반드시 형사처분 또는 징계처분을 받을 적법성을 구비함을 요하지 않는다. 형사미성년자 또는 징계처분을 받을 신분(공무원) 없는 자에 대하여도 본죄는 성립한다. ‘형사처분 또는 징계처분을 받게 할 목적’으로 하여야만 하므로 본죄는 목적범이다. 따라서 형사처벌 또는 징계처분을 받았는가는 본죄의 성립에 영향이 없다. 징계처분은 특별권력관계에 기인한 징계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명칭을 묻지 않고 일체의 징계처분을 포함한다. ‘공무소 또는 공무원’이란 형사처분 또는 징계처분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해당 관서 또는 관헌 및 그 보조자와 감독자를 말한다.

 

‘허위의 신고’란 객관적 사실에 반하는 사실을 신고하는 것을 말하며, 해당 관청이 잘못된 직권발동을 함에 족할 정도의 구체성을 가진 사실을 신고한 것이 아니어야 하고, 그 신고내용에는 처분을 요구하는 취지를 명시할 필요가 없다. ‘신고’는 허위임을 인식하고 자진하여 하여야만 한다. 관청의 추문에 대하여 허위의 진술을 하였더라도 반드시 본죄가 성립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신고방법은 구두이거나 서면이거나 혹은 고소 · 고발의 방식에 의하거나 익명에 의하거나를 불문한다.

 

신고의 방식에는 제한이 없어 구두(口頭), 서면, 고소·고발, 진정서의 형식 및 기명(記名), 익명(匿名), 자기명의, 타인명의에 의하건 상관없다. 이 죄를 범한 자(10년 이하 징역 또는 1500만 원 이하의 벌금)가 그 신고한 사건의 재판 또는 징계처분이 확정되기 전에 자백 또는 자수한 때에는 그 형을 감경(減輕) 또는 면제한다(157조).

 

 

 

■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이란?

 

대륙간탄도미사일은 대륙간탄도탄이라고도 한다. 미국보다 러시아가 먼저 1957년 8월에 개발하였고, 미국은 59년에 실용화하였다. 일반적으로 5,000km 이상의 사정거리를 가진 탄도미사일을 말하며, 보통 메가톤급의 핵탄두를 장착하고 있다. 다른 대륙에 있는 적의 시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영어로는 '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이라 하며 흔히 약자인 ‘ICBM’으로 부른다. 적의 군사적, 경제적 기반을 공격하는 전략무기체제의 하나로 핵탄두를 장착하여 먼 거리에 있는 적의 시설을 공격한다. 전략핵무기 중에서도 발사준비에 걸리는 시간이 짧고 위력적인 것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의 특징이다. 전략탄도미사일 중에서 사거리가 960~5,500km 정도로 ICBM보다 좁은 범위를 요격하는 미사일은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Intermediaterange Ballistic Missile)'이라 한다. 핵잠수함에서 발사하는 미사일은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Submarine-Launched Ballistic Missile)이라 한다.

 

▶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 역사

 

탄도미사일의 시초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나치가 개발한 'V-2'로 알려졌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관련 기술을 입수한 미국과 소련이 탄도미사일 개발을 시작했다. 소련은 1957년, 미국은 1959년에 대륙간탄도미사일인 'R-7'과 ‘아틀라스' 미사일을 각각 개발했으나 발사 준비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등의 한계가 있었다. 1960년대에는 수소폭탄을 장착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등장했다. 1970년대 미국에서는 하나의 대륙간탄도미사일에 다수의 핵탄두를 탑재한 MIRV(Multiple Independently-targetable Reentry Vehicle)이 개발되었다. MIRV는 여러 핵탄두를 가지고 있어 다수의 목표 지점을 동시에 공격할 수 있다. 1980년대는 소련의 토폴-M(Topol-M)과 같은 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도 만들어졌다.

 

 

▶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 특징

 

액체·고체 연료를 사용한 다단식(多段式) 로켓으로 1,500∼3,500km의 고공에 쏘아 올려지고, 400∼500km의 거리에서 레이더에 의한 제어가 가해지면 엔진의 가동이 중단되고, 그 이후는 속도벡터에 의해 역학적으로 결정되는 탄도(彈道)를 비행하여 목표에 도달한다. 다른 탄도미사일과 마찬가지로 발사된 후 포물선 궤도를 그리며 떨어진다. 탄도미사일은 날아가면서 속도와 고도가 바뀌는 미사일이다. 탄도(彈道)란 발사된 탄환이 목표에 이르기까지의 궤적을 말한다. 탄도미사일은 로켓을 엔진으로 사용한다. 로켓은 순간적인 폭발력이 뛰어난 대신 연료소모가 심해 오랜 시간 추진이 불가능하다. 즉 발사된 미사일은 시간이 지나면서 고도가 떨어지기 마련이므로 멀리 있는 표적을 맞히려면 최대한 높게 발사해야 한다. 대륙간탄도미사일은 탄도미사일 중에서도 가장 먼 거리를 요격한다. 따라서 가장 높은 고도까지 올라가는데, 대기권을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탄도미사일은 떨어질 때 중력의 영향을 받아 충돌 직전에는 음속의 몇 배로 속도가 빨라진다. 따라서 적이 미사일을 발견하더라도 엄청난 속도로 인해 방어가 쉽지 않다. 미국은 이를 방어할 목적으로 대기권 밖에서 탄두가 떨어지기 전에 요격하는 GBI각주1) 미사일을 개발하기도 했다.

 

▶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 현황

 

2016년 기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운용하는 국가는 미국과 러시아, 중국, 인도 등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대륙간탄도미사일은 '미니트맨 III'라 불리는 'LGM-30 미니트맨(LGM-30 Minuteman)’이다. 미니트맨 III는 최대 3개의 핵탄두를 장착하고 13,000km 떨어진 장소를 폭격할 수 있는 ICBM이다. 러시아는 RT-2PM 토폴을 포함해 RS-24 야르스, RSM-56 불루바 등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가지고 있다. 2016년 러시아는 신형 ICBM인 'RS-28 사르마트'의 개발을 거의 완료했으며 시험 발사를 거쳐 2018년 실전 배치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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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인조반정 1623(광해군 15)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인조)을 왕으로 세운 정변. 광해군은 임진왜란 후 대북파를 기용하여 개혁적인 정책을 펴 나갔다. 그러나, 적자가 아니었던 광해군은 형제들을 죽이고, 대비를 유폐하였고, 오랑캐라고 할 수 있는 후금과 명에 균형외교를 유지하여 중화사상에 물든 서인들의 불만이 컸다.

 

서인세력은 사림을 규합해 선조의 손자 능양군을 왕위에 올리기로 하고 반정을 일으켰다. 당시 훈련대장 이흥립이 성문을 열어 반군을 맞아들여 반정은 쉽게 성공했다. 반정세력은 인목대비를 복권하고, 광해군을 폐위하고 능양군을 왕위에 올렸다. 또한 집권했던 대북파들을 처형하고, 자신들은 정사공신이 되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내정과 외교에서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다. 내정 면에서 왜란으로 인해 파괴된 사고(史庫) 정비, 서적 간행, 대동법 시행, 군적(軍籍) 정비를 위한 호패법의 실시 등 많은 치적(治績)을 남겼으며, 외교 면에서도 만주에서 크게 성장한 후금(後金)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국제적인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했다. 그러나 왕위를 위협할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동복형(同腹兄)인 임해군(臨海君)과 유일한 적통(嫡統)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했으며,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호를 삭탈하고 경운궁(慶運宮:西宮)에 유폐(幽閉)했다.

 

이러한 행위는 성리학적 윤리관에 비추어 패륜으로 여겨졌고, 명을 배반하고 후금과 평화관계를 유지한 것도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던 당시의 사림들에게는 큰 불만이었다. 그리하여 광해군이 즉위할 당시부터 정치권력을 잃었던 서인세력들이 그러한 사류(士類)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정변을 계획했다.

 

1620년부터 이서·신경진(申景禛)이 먼저 반정의 계획을 수립한 후 구굉(具宏)·구인후(具仁垕) 등을 끌어들이고, 이어 김유·이귀·최명길(崔鳴吉) 등의 문신과 연계하여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면서 1623년 3월 1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진행시켰다. 이 계획은 거사 직전에 이이반(李而攽)의 고변(告變)에 의해 누설되었지만 광해군이 후궁과 연회를 즐기느라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예정대로 추진되었다. 능양군은 직접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이서가 장단으로부터 통솔해온 700여 명의 군사와 연서역(延曙驛)에서 합류한 후, 김유를 대장으로 삼아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했던 이귀·최명길·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 등의 600~700여 명의 군사, 그리고 이천으로부터 온 이중로(李重老)의 군사 등과 함께 창의문으로 진군하여 성문을 격파했다.

 

이어 창덕궁에 이르자 반정군에 포섭되었던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내응으로 훈련도감의 군사가 반정군을 체포하지 않고 오히려 성문을 열어줌으로써 대궐을 쉽게 점령했다. 반정세력은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호를 회복시켜준 후 그 권위를 빌려 광해군과 동궁을 폐출하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을 왕위에 추대했다. 한편 광해군은 반정군이 대궐에 침입한 뒤 비로소 대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으로 숨었으나 곧 체포되어 서인으로 강등된 후 강화로 귀양보내졌다.

 

또한 폐모정청(廢母庭請) 등에 앞장섰던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은 물론 북인으로서 광해군 말기까지 정치에 관여했던 수십 명이 처형을 당하고, 200여 명이 유배당했다. 반면 반정에 참여한 인물들은 1623년(인조 1) 윤 10월 53명이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책봉되었다.

 

인조반정 후 정권을 장악한 서인은, 광해조 대북정권 몰락의 원인을 정책의 패륜성에서도 찾았지만, 보다 주요한 원인은 당시 정치세력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던 서인·남인 등 다른 붕당의 존재와 반대의견을 무시함으로써 야기된 불만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서인정권은 북인을 도태시키면서도, 남인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임명하는 등 명분상 하자가 없는 남인을 크게 등용함으로써 반대당의 존재와 비판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괄의 난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한 뒤 서인들은 반정공신인 공서파와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로 갈라졌다. 공신들 간의 알력이 심해지면서 1624년 1월 문회·허통·이우 등이 이괄과 그의 아들 전·한명련·정충신·기자헌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했다.

 

이괄은 아들 전이 모반의 사실여부를 가린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붙잡혀 가게 되자, 전을 압송하러 온 이들을 죽인 후 1만 2,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역시 모반혐의로 압송되고 있던 한명련을 구출한 뒤 서울로 진격, 황주·마탄·임진 등에서 관군을 잇달아 격파하고 서울을 점령했으며, 선조의 아들 흥안군 제를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다음날 뒤쫓아온 관군에게 파주 길마재에서 크게 패하여 광주·이천으로 후퇴하던 중 죽음을 당함으로써 반란은 실패했다.

 

임진왜란 때 붕당간의 본격적인 쟁권(爭權)은 가장 주전론적 입장에 섰던 북인들의 승리로 귀결되었지만, 이들은 다시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대북(大北)·소북(小北)으로 나뉘었다.

 

이후 광해군대에 정인홍(鄭仁弘)·이이첨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북정권은 왕권의 확립을 위해 서인·남인 등 다른 붕당의 의견을 무시하고, 소북계의 지지를 받은 영창대군을 살해하며,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는 등 무리한 조치를 취했다. 이에 서인계열의 사림세력들은 패륜행위를 명분으로 대북정권을 타도하고 정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1623년(광해군 15) 서인계의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 등과 함경북도병마절도사 이괄 등은 반정을 위해 사모군(私募軍)을 이끌고 홍제원(弘濟院)에 모였다.

 

그런데 총지휘자로 추대되었던 김유(金瑬)가 사전 계획 누설을 이유로 소극적으로 행동하자, 이괄은 이를 비난했다. 따라서 반정에 성공한 후에도 김유와의 관계가 불편했다. 인조 즉위 후 서인들은 반정공신인 공서파(功西派)와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淸西派)로 갈려졌고, 공신들의 사적군사력이 그대로 유지되자 '훈신군관'에 대한 비난이 높아졌다.

 

공서파들은 정권 안정을 위해 대북·소북 인사의 처형과 반역음모 적발에 힘을 기울였고, 자기파 중심의 논공행상을 함에 따라 비서인이자 무관인 이괄은 한성부판윤에 머물게 되었다. 이어 후금(後金)의 성장으로 인해 북방문제가 심각해지자 이괄은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휘하의 평안북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에 임명되어 영변으로 출진했다.

 

그런데 1624년 1월에 문회(文晦)·허통(許通)·이우(李佑) 등이 이괄과 그의 아들 전(旃)·한명련(韓明璉)·정충신(鄭忠信)·기자헌(奇自獻)·현집(玄楫)·이시언(李時言)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했다. 이에 기자헌·현집 등을 문초했으나, 역모에 대한 단서는 잡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공서파들은 이괄이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두렵게 생각하고 일단 아들 전을 서울로 압송하여 문초하려 했다. 이에 이괄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전을 압송하러 온 이들을 죽이고 역시 서울로 잡혀가는 한명련을 구해내어 "군측(君側)의 악을 숙청한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1월 22일 항왜병(降倭兵) 100여 명을 선봉으로 하여 1만 2,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향했다. 이괄군은 도원수군과의 충돌을 피하여 영변-자산(慈山)-상원(祥原)-평산(平山)-개성의 진격로를 택했다. 이괄군은 황주신교(黃州薪橋)에서 정충신과 남이흥(南以興)의 군대와 싸워 크게 이긴 후, 평산(平山)이 경비가 엄함을 알고 봉산 고읍(古邑)에서 전탄(箭灘)을 건너 샛길로 진군하여 마탄(馬灘:예성강 상류)에서 또 관군을 대파했다. 이괄군이 개성으로 진격함에 따라 인조는 공주로 피난갔고, 2월 11일 반군은 서울에 입성하여 경복궁 옛터에 주둔하여 선조의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왕으로 추대하고, 관원을 배치하여 새로운 행정체제를 세웠다.

 

한편 각처에 방을 붙여 도민(都民)의 마음을 안심시키며 생업에 충실할 것을 당부했다. 이때 도원수 장만의 군사와 각지 관군의 연합군은 길마재[鞍峴]에서 진을 치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반란군의 공격에 응전했다. 2월 11일 이괄군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길마재를 포위·공격했으나, 대패하고 밤에 수구문(水口門:지금의 광희문)을 나와 광주(廣州)로 향하다가 관군의 추격으로 완전히 흩어졌다.

 

이후 이괄·한명련이 2월 15일 이천(利川)에서 부하장수 기익헌과 이수백에게 죽음을 당함으로써 난은 실패했다. 이괄의 난은 대내적으로 수도의 함락, 국왕의 몽진(蒙塵) 등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와 공신세력 내부의 갈등의 노골화, 어영청 등 군영재편을 초래했으며, 대외적으로는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이 후금으로 도망가 남침(南侵)의 야욕을 자극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의 명분을 제공하기도 했다.

 

 

광해군과 인조반정

 

광해군(光海君, 1575~1641)

 

본명은 이혼으로 조선의 15대왕으로 선조의 아들이다. 조선왕조를 통틀어 조와 종과 같은 왕의 칭호를 받지 못한 2명(연산군, 광해군) 중 1명이다. 연산군은 왕의 역할을 못해 페위되었다면 광해군은 촉발된 사건으로 인해 폐위가 되 군(君)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광해군은 누구인가?

 

1. 임진왜란 중 세자에 책봉되다.

 

광해군은 1575년(선조 8)에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혼(琿)이다. 공빈 김씨는 임해군과 광해군 두 아들을 낳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임해군과 광해군은 자식이 없던 의인왕후의 손에서 자랐다. 조정에서는 일찍부터 세자를 세우는 일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선조는 적자가 없는 상황에서 세자를 옹립하는 일 자체를 꺼려했다.

 

그러나 뜻밖의 상황이 광해군을 세자로 만들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도성을 버리고 피란을 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분노로 들끓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대신들도 더 이상 세자 책봉을 미룰 수 없다며 왕을 압박했다. 끝까지 망설이던 선조는 결국 광해군을 세자로 삼기로 했다. 큰아들인 임해군을 두고 광해군을 세자로 세운 것은 임해군의 성질이 포악해 세자가 될 자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세자에 책봉된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분조를 이끌며 종묘와 사직을 지켰다. 그리고 들끓는 민심을 수습하고, 군국기무를 맡아 민·관군과 의병의 활동도 독려했다. 왕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한 것이다. 광해군은 1592년(선조 25) 6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분조를 이끌었다. 최홍원(崔興源), 이덕형(李德馨), 이항복(李恒福) 등이 광해군의 분조에서 활약했다. 광해군은 분조가 해체된 후에도 군무사(軍務司)의 업무를 주관하며 국란 극복에 앞장섰다.

 

2. 정통성 논란과 왕위 계승

 

전쟁은 끝났다. 이제 모두가 합심해 전란으로 상처 입은 국토와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야 할 때였다. 그러나 당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 중심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이미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고, 전란 중에는 왕을 대신해 분조까지 이끌었는데 새삼스럽게 왕위 계승 문제가 불거진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원인은 명나라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명나라에서 광해군이 적자도 아니고 장자도 아니라는 이유로 세자 책봉 재가를 미루고 있었다. 이는 당시 명나라의 정치적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이를 빌미로 조선을 조종하려던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선조도 마음이 돌아섰다. 전쟁 중에 광해군을 세자로 삼아 나라의 근본을 세우겠다던 선조의 태도 변화에 광해군은 당황했다.

 

1606년(선조 39), 선조의 바람대로 첫 번째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났다. 이는 곧 광해군의 시련으로 이어졌다. 선조는 아예 노골적으로 "명나라의 책봉도 받지 못했으면서 세자 행세를 하느냐."라며 광해군의 문안조차 받지 않으려 했다. 조정에서는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중심으로 영창대군을 세자로 옹립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이것은 광해군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었다. 광해군은 정통성 논란과 함께 서른 살이나 어린 동생과 왕권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조가 1608년(선조 41)에 갑자기 병이 깊어지면서 상황은 광해군에게 유리하게 급반전되었다. 죽음을 앞두고 선조가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한 것이다. 아무리 적자라도 겨우 두 살인 영창대군에게 보위를 물려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1608년(선조 41) 2월 1일 선조가 눈을 감자 광해군은 즉위식을 올리고 조선의 15대 왕으로 즉위했다.

 

3. 왕권과 패륜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명나라에 선조의 죽음과 자신의 즉위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차일피일 미루던 명나라는 광해군의 즉위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장자인 임해군이 있는데 어떻게 차자인 광해군이 왕위를 차지했냐는 것이었다. 이에 당황한 사신 이호민(李好閔)이 급히 변명했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세자 시절 내내 정통성 논란에 시달렸던 광해군에게는 슬픈 소식이었다. 게다가 명나라에서는 임해군을 직접 만나 내막을 알아보겠다며 조사단까지 파견했다. 임해군은 광해군의 동복형으로, 타고난 성품이 사납고 방자해 왕위 계승 경쟁에서 밀려난 인물이었다. 따라서 자신을 밀어내고 동생인 광해군이 왕이 된 데 불만이 많았다. 대북 일파는 임해군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광해군은 혈육을 죽일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러나 대북은 기어이 모반죄를 씌워 임해군을 강화로 귀양 보내고, 그와 관계된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다 죽였다. 그런 임해군을 명나라 조사단이 직접 만나겠다고 하니 광해군과 대북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임해군을 협박해 입단속을 하고 조사단에게 뇌물을 주는 것으로 사태를 무마했다.

 

광해군은 1609년(광해군 1) 3월에야 겨우 명나라로부터 책봉 조서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 5월 임해군은 유배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정확한 사인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으나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현감이 그를 살해했다고 알려져 있다. 임해군을 직접 죽인 것은 아니지만 이 일로 광해군은 왕권을 지키기 위해 혈육의 죽음을 방조한 패륜 군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임해군의 죽음 이후로도 진릉군, 능창군 등의 왕족이 연루된 대규모 옥사가 발생했다. 광해군과 대북은 이런 식으로 정적을 제거해 나갔다. 그러나 그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인물은 어린 이복동생 영창대군이었다. 광해군이 어렵게 명나라의 승인을 받았다고는 하나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이 살아 있는 한 정통성 논란은 언제고 다시 재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영창대군을 처단하라는 삼사와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이어서 폐모론까지 등장했다. 그 뒤에는 이이첨 등이 있었다. 이이첨의 무리는 이 일에 동조하지 않는 서인들에게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항복, 이덕형 등은 끝내 대북의 폐모론에 동조하지 않다가 죽었다. 결국 이것은 훗날 서인들이 반정을 일으키는 명분이 되었다.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된 데 이어 강화로 유배되었다. 당시 영창대군의 나이는 겨우 여덟 살이었다. 1614년(광해군 6) 영창대군은 아궁이에 불을 지펴 펄펄 끓는 밀실에 갇혀 질식해 죽고 말았다.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부사가 저지른 일이었다. 임해군에 이어 영창대군까지 살해되면서 광해군은 패륜의 멍에를 쓰게 되었다.

 

한편 어린 자식을 잃고 슬픔에 빠진 인목대비는 경운궁에 홀로 남겨진 채 사실상 연금 상태로 지냈다. 그런 와중에 경운궁(慶運宮)에서 임금을 비방하는 내용의 익명서가 발견됨으로써 인목대비 폐비에 관한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618년(광해군 10) 1월, 인목대비는 폐비되어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 대북은 폐비에 반대한 인사들을 모두 조정에서 쫓아내는 등 계속해서 전횡을 저질렀다. 광해군은 왕권에 대한 집착으로 이들의 전횡을 묵과했다. 스스로 반정의 불씨를 키운 것이다.

 

4. 광해군의 업적

 

왕권을 지키기 위해 패륜을 저지른 군주라는 것이 광해군의 본질은 아니다. 그는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을 다시 재건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가시적인 성과도 이룩했다. 광해군의 재위 기간 중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외교 정책이다.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실리주의적 등거리 외교를 펼쳤다. 사대교린의 외교 정책을 고수했던 이전까지의 왕들과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일면이었다.

 

광해군이 왕위에 있던 17세기 초는 중국 대륙에서 명조와 청조가 교체되던 시기였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이후 국력이 더욱 쇠퇴해 멸망의 길로 가고 있었다. 반면 후금은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가 청나라를 세우고 점점 세력을 넓혀 갔다. 그리고 마침내 1618년(광해군 10) 청은 명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작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낸 것에 대한 보은으로 조선에 파병을 요구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출병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조선에 중립을 요구하는 후금과의 관계를 고려한 것이었다. 광해군은 섣불리 명의 요구를 들어주었다가 후금이 조선을 침범할 것을 우려했다. 물론 이것은 명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던 대부분 대신들의 생각과는 달랐다. 광해군은 명분보다는 실리를 선택했다.

 

광해군이 이룩한 업적 중 또 하나는 바로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이다. 대동법은 백성들이 부담하는 공물을 실물 대신 미곡으로 통일해 납부하도록 한 근대적 개념의 세제이다. 이전까지의 공납은 지역별로 배정된 품목을 직접 바치는 것으로 백성들의 부담이 컸다. 또한 그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은 특산품이 공물로 배정되는 경우도 있어서 방납(防納)의 폐단이 있었다. 이러한 방납의 폐단을 줄이고자 임진왜란 때는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이 시행되었다. 이 대공수미법을 보완하고 확대한 것이 대동법이었다.

 

5. 광해군 반정으로 무너지다.

 

1623년(광해군 15) 3월, 이서(李曙), 이귀(李貴), 김류(金瑬) 등을 주축으로 한 서인 반정군이 창덕궁에 들이닥쳤다. 반정의 낌새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던 광해군은 그제야 궁성을 넘어 도망쳤지만 곧 잡히고 말았다. 이렇게 광해군과 대북 정권은 끝이 났다.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능양군(綾陽君)을 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16대 왕 인조다.

 

광해군은 문성군부인 유씨 그리고 폐세자 부부와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그해 7월, 폐세자 질은 땅굴을 파서 위리안치된 집에서 도망치려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이어 세자빈 박씨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문성군부인 유씨는 1624년(인조 2)에 병으로 죽었으며, 광해군은 19년의 유배 생활 끝에 1641년(인조 19)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능리에 있다.

 

광해군이 폐출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반정 세력은 살제폐모(殺弟廢母)의 패륜과 명나라에 대한 불충을 반정의 이유로 내세웠다. 하지만 이것은 겉으로 내세운 명분일 뿐, 좀 더 본질적인 원인은 대북 정권의 독주로 인한 서인 세력의 반발이었다. 왕권을 지키려는 욕심에 대북의 전횡을 묵과한 것이 광해군의 패착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어떤 면에서 시대를 앞서간 왕이었다. 반정으로 그 의미가 퇴색되긴 했지만 국란을 극복하고 국가의 안정을 유지하려고 했던 광해군의 노력은 그 자체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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